
일상 미학, 류연희의 주전자
금속공예가 류연희의 주전자는 삶 가까이에 들여놓고 오래 음미해야 한다.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모양새가 시간이 흐를수록 아름다움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금속공예가 류연희는 철과 비철로 나뉘는 금속공예의 재료에서 황동, 은과 같은 비철을 중심으로 작업하는 작가다. 전시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전시가 시작되기 전, 아직 류연희 작가의 작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갤러리 도큐먼트에서 작가를 만났다. 쇼팽이 잔잔히 흘러나오는 곳에서 오십을 넘긴 작가는 자신이 다루는 재료처럼 단단하게 앉아 있었다.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는 그가 머릿속으로 그려내 만든 자유롭고 아름다운 형태의 일상의 물건들, 그중 주전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Q. 황동과 적동, 그리고 은을 이용해 컵과 주전자, 접시와 과반(果盤), 화병 등 다양한 작업을 해오고 계신데요, 주전자에는 특별한 애착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주전자를 특별하게 여기시는 이유가 궁금해요.
A. 다른 작업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주전자를 만드는 게 사실 무척 어려워요. 주구, 손잡이, 부리, 뚜껑, 하나하나 손이 많이 가죠. 금속공예학과를 졸업했다고 하면 주전자를 만들어봤느냐고 물어볼 정도예요.

(왼쪽) 적동 주전자 / (오른쪽) 은 주전자
Q. 챕터원의 갤러리 도큐먼트에서 진행한 100가지 테이블웨어 전시에서는 그 어려운 주전자를 22개나 만드셨어요. 준비 기간이 길지 않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작업하셨나요?
A. 제가 원하는 형태를 조각조각 만들어 하나하나 맞춰나갔어요. 몸통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몸통 수십 개를 먼저 만든 다음 주구, 손잡이를 작업했죠. 계속 밭을 일군 거예요. 그러고 나서 어울리는 것들을 맞췄어요. 주전자 하나를 완성한 다음 다른 하나를 완성한 게 아니라, 어느 날 주전자가 몇 개씩 완성된 거죠.

은으로 만든 주전자와 과반
Q. 디자인이 같은 것도 있나요?
A. 다 달라요. 제가 싫어하는 게 똑같은 거예요. 같은 건 하나도 없어요.
Q. 작가님 주전자를 보면 고전적인 느낌도 있지만 현대적인 분위기도 풍겨요.
A. 저를 작업이나 인스타그램으로만 아는 사람은 제가 나타나면 깜짝 놀라요. 젊은 작가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요. 저에겐 작업이 일종의 놀이예요. 몸은 늙었어도 작업 자체가 즐거우니까 작품도 젊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갤러리 도큐먼트에서 열렸던 류연희 작가의 전시
Q. 주전자는 테이블웨어잖아요. 실용적 측면과 심미적 측면을 어떻게 조율하셨나요?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시는지도 궁금해요.
A. 무언가에서 영감을 얻는다기보다 제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들어요. 어디에도 없는데 갖고 싶은 것을요. 딱히 실용성이나 심미성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시작하지도 않고요. 얼마 전에는 작업실에서 커피 내릴 때 사용하려고 동주전자(드립 포트)를 제작했어요. 필요에 의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가 좋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또는 물이 새는지, 물이 이상하게 떨어지지는 않는지를 잘 알죠. 먼저 써봤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평소에 디자인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자유로움이 있어요. 일상에서 필요한 것인 만큼 손잡이는 이랬으면 좋겠다, 자유로운 곡선이였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뿐이에요.

류연희 작가
“실생활에서 쓰는 물건이지만,
그 자체로 오브제가 될 수 있어요.”
그 자체로 오브제가 될 수 있어요.”
Q. 금속공예는 본래 정확한 치수와 깨끗한 표면, 칼 같은 선, 날카로움이 특징인 미술 장르라고 알고 있었어요.
A. 꼭 선이 칼 같아야 할까요? 물론 저도 학생 때는 그런 교육을 받았어요. 그런데 정답은 없잖아요. 졸업하고 나서까지도 반드시 그렇게 하란 법은 없어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죠. 휘게 만들거나 표면을 더럽게 하거나 톱질한 자국이 울퉁불퉁 나 있거나 어떻게든 상관없어요.

류연희 작가의 작품에 찍혀있는 직인. 왼쪽부터 꽃, 언덕에서 내려오는 돌, 동그라미, 새싹. 각각 잘 펴라, 잘 굴러라, 잘 돌라는 의미가 담긴 작가만의 주문이다. 새싹은 1990년부터 써온 것.

작은 크기의 은 접시
Q. 작가님 스스로 “마음을 다해 대충 만들고 싶다”라고 표현하셨죠.
A. 금속의 딱딱한 성질을 유연하게 보이려고 노력해요. 마음을 다해 대충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그러한 노력은 재료와 대화하는 것에서 시작돼요. 생명체는 아니지만, 제가 금속에 줄질이나 망치질을 하면 얘도 ‘뻐팅길’ 수 있잖아요.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계속 타협해요. 그리고 형태의 자유스러움은 금속이라는 재료의 고유한 성질을 넘어, 재료로서 또 다른 차원을 보여주고 싶은 거죠.
Q. 평소 작업할 때 중요하게 여기시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A. 저는 특별히 대단하다고 불리는 것보다 익숙하고 친근한 느낌이 오히려 더 낫지 않나 생각해요. 낡은 것과는 조금 다르죠. 감상을 위한 작업이 아니라 사람과 가까이에서 감상과 감정, 그리고 감동을 공유하게 하는 힘을 갖고 싶은 거예요. 자유롭고 따뜻한 작업은 보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친근감을 느끼게 하거든요.

손잡이가 독특한 은 주전자
Q. 그게 일상과 미학이 맞물리는 지점이 아닐까 싶어요.
A. 맞아요. 그리고 실생활에서 쓰는 물건이지만, 그 자체로 오브제가 될 수 있어요.
Q. 마지막으로 작가님의 향후 목표가 궁금합니다.
A. 갤러리 도큐먼트에서 선보인 100개의 작품 전시는 규모가 큰 작업이었어요. 그걸 보고 사람들이 대단한 걸 해냈다고 하는데, 사실 잘 모르겠어요. 매일 작업하니까 그렇게 힘든 건지, 대단한 건지 말이죠. 다만 저는 계속하고 싶어요. 지금 제가 50대 후반인데요, 제 연령대에는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어요. 더구나 여자는 한 명도 없죠. 끝까지, 끝까지라는 건 제가 팔을 움직이고 거동이 불편해도 어떻게 할 수 있을 때까지, 건강하게 작업하는 게 제 소원이에요. 더 바라는 건 없어요.
금속공예가 류연희의 작품들은 조은숙 갤러리와 챕터원에서 만날 수 있으며, 주전자는 80만원에서 180만원 대에 구매할 수 있다.
작업실에서의 류연희 작가 ⓒ 류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