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판화가의 비밀스런 가게
시청, 명동, 남대문을 곁에 둔 서울의 중심부. 번잡한 거리 사이에 서 있는 건물 3층에 판화가 최경주의 작업실과 그의 프린팅 레이블 ‘아티스트 프루프’의 쇼룸이 있다. 판화가의 작품을 쇼핑하기 위해 그의 비밀스러운 쇼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예술가는 자기 안에 있는 이야기를 표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다. 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최경주가 1년여의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대학원으로 돌아온 이유 역시 ‘다시 작업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판화라는 매체에 대한 매료가 컸던 것 같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어요. 마침 전공과목이 판화인 학교가 있었고, 무작정 대학원에 들어갔죠.” 그가 오늘날 판화가라고 불리기까지 여러 번의 선택이 있었음에도 어쩐지 운명의 실을 따라 걸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최경주는 실크스크린과 에칭 등 판화의 특징을 활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해낸다.
아티스트프루프

아티스트 프루프 쇼룸 내부

Q. 판화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A. 맞아요. 저희가 초등학생 때는 볼록판화, 오목판화부터 시작하잖아요. 목판화, 공판화도 판화인 거고요. 실크스크린 같은 경우에는 공판화예요. 에칭은 동판화고요. 부식시킨 단면 안에 잉크를 채워서 찍어내는 방식이죠. 저쪽에 있는 게 프레스기인데요, 저 압으로 종이에 찍혀 나오는 거예요. 굉장히 많은데 제가 다룰 수 없는 것도 있고, 저와 맞지 않는 것도 있어요.
 
Q. 완성된 형태를 염두에 두고 작업하나요? 작가님의 실크스크린 작업은 즉흥적으로 보이기도 하거든요.
A. 그렇죠. 정형화되지 않은 것들이 겹쳐져서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 거잖아요. 하나하나의 도형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아무래도 덩어리부터 시작해 그걸 해체하고, 다시 쌓으면서 우연의 효과를 기대하죠. 끝을 보고 되돌아와서 다시 가는 그런 작업을 계속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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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주 작가의 실크스크린 판

“덩어리부터 시작해 그걸 해체하고,
다시 쌓으면서 우연의 효과를 기대해요.”
판화가 최경주
Q. 작업량이 많은데, 그 많은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나요?
A. 사소한 거, 그리고 쓸데없는 것에서요.(웃음) 먼지나 작업하면서 생긴 얼룩의 모양 같은. 요즘엔 출퇴근길에 보이는 눈에 띄는 부분들을 확대하거나 축소하며 이미지를 수집하고 있어요. 제 주변을 관찰하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보물이 있지 않을까, 다시 또 보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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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지와 소품들로 가득한 작업실 책장

Q. 블루와 오렌지 같은 채도 높은 컬러를 작품에 많이 사용해요.
A. 음, 제가 어릴 때부터 다양한 색을 썼다고 하더라고요. 저 자신이 색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는 혼자서 공부도 많이 했어요. ‘이 색과 저 색을 배합하면 무슨 색이 될까?’ ‘수채화에 크레용을 쓰면 어떤 느낌이 나올까?’ 등을 생각하면서요. 똑같은 색깔이라도 회사마다 느낌이 다른 만큼 각 회사의 차이점을 찾아보기도 하고요. 그런 과정에서 저만의 색깔이 나온 것 같아요.
 
Q. 자주 사용하는 형광색은 특별히 좋아하는 색인가요?
A. 네. 저 자신과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제 스스로가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고 색을 보니, 여러 색 중 형광색이 그렇더라고요. ‘형광색이 다른 색과 섞여 자연스러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색에 저를 이입했던 것 같아요. 이런 제 얘기를 듣고 다시 보면 색 자체의 경쾌함과 비비드함만 있는 건 아니라고 느낄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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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주 작가가 사용하는 안료

Q. 왜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나요?
A. 어릴 때 환경부터 시작해서 전체적으로요. 그런데 작업을 하고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느낀 게, 많은 이가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래서 공감을 얻는 것 같기도 해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느꼈을 거예요. 제가 이 작업을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생각하거든요.
 
Q. 처음엔 판화가라고만 생각했는데, 페인팅, 모빌, 오브제 등 작품 범위가 매우 다양해요.
A. 개인적으로 ‘밸러스’라는 단어를 좋아하는데요, 특별한 목적이 있거나 없는 일을 줄타기하듯 병행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작업은 목적이 없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목적 없이 내 안에 있는 것을 표현하는 거죠. 누구한테 보여줘야겠다, 뭘 해야겠다는 생각 없이 작업 자체에 집중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파생되는 것, 또는 이것이 전시 형태로 넘어갈 때는 제3자의 시선이 개입하죠. ‘이걸 어떻게 봐줬으면 좋겠다’라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목적이 생기고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면서 재미있을 것 같은 걸 하는 거예요. 그게 다시 목적 없는 제 작업이 된 거고요. 그렇게 왔다 갔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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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주 작가가 만든 컵과 모빌

Q. 요즘 작가님의 흥미를 끄는 건 뭔가요?
A. 지금은 개인적인 것보다 어떤 생태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앞서요. 제 친구들이 다 예술가인데, 각자 고군분투하며 어렵게 작업을 이어가고 있어요. 친구들과 함께하다 보니 선순환이 자연스럽게 생각나더라고요. 선순환은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에요. 경제적인 부분이 크죠. 퍼포먼스, 공예, 패션, 영상, 음악, 설치, 가구 등을 하는 친구들과 재미있는 작업을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굿즈나 콘텐츠로 어떤 플랫폼을 만드는 거예요. 한 사람이 지닌 가능성을 오랫동안 볼 수 있는 방법, 그것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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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프루프 숍

“사람들이 이곳에서 전체적인 것을 경험하고 그중 일부를 가져간다는 느낌을 받으면 좋겠어요.”
판화가 최경주
최경주는 2014년부터 프린팅 레이블 ‘아티스트 프루프(Artist Proof)’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판화를 기반으로 한 상품 제작과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 중이다. 출판사 민음사에서 출간한 도서 <그리스인 조르바>의 표지 작업 등이 이에 해당한다. 아티스트 프루프의 상품은 쇼룸이자 전시장, 라이브 공연장으로 활용되는 ‘아티스트 프루프 숍(이하 AP SHOP)’에서만 판매하며, 숍은 최경주와 그의 남편이자 트럼펫 연주자인 이동열이 함께 이끌어가고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AP SHOP에서는 최경주 작가와 다른 작가의 협업 전시가 진행된다. 전시에 맞춰 공간이 리뉴얼되어 올 때마다 새로운 기분을 갖게 된다.
Q. 아티스트 프루프가 판화 용어로 ‘작가 소장본’을 의미한다고 들었어요. 이를 이름으로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A. 실크스크린 작업이 하나의 패턴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패턴은 일정하잖아요. 어느 한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게 패턴이라면, 저는 똑같은 게 없어요. 제가 다 직접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보거든요. 자세히 보면 다 달라요.
 
Q. 작품 하나하나가 소장품이라는 의미인가요?
A. 판화는 원래 인쇄술이잖아요. 인쇄술이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된 거라 두 특성이 다 있어요. 판화 자체로 표현되는 것과 우연성 같은 것. 드로잉으로 선을 긋는 것과 판을 찍는 것은 선의 느낌이 완전히 달라요. 표현 방법에서 굉장히 좋은 매체죠. 상품으로 넘어가면 작가가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인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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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서 최경주 작가

Q. 작업을 바탕으로 굿즈을 만든 계기가 있나요?
A. 전에는 작가로서 페인팅 등의 작품만 전시했어요. 관람객이 제 작업을 보고 있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면 약간 찡하기도 하고, 묘한 감동이 있죠. 그 후에 예술가들이 만든 굿즈를 판매하는 전시를 했는데, 반응이 너무 즉각적인 거예요. 두 경우 모두 제 작품임에도 다른 만족감을 주더라고요. 거기에서 시작된 것 같아요. 내 작업에서 나온 굿즈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Q. 온라인 숍을 운영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요.
A. 공간에 있을 때와 화면 안에 있을 때가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왕이면 이곳에 와서 전체적인 것을 경험하고 그중 일부를 가져간다는 느낌을 받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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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조금씩 다른 패브릭 가방

아티스트프루프

러그나 포스터 등으로 사용할 수 있는 패브릭

Q. 3월에 전시를 앞두고 있다고요.
A. 3월 14일부터 플랫폼엘에서 전시와 공연을 해요. 타이틀은 ‘도시 시 프로젝트(City Poem Project)’예요. 제가 서울에서 수집한 이미지로 만든 개인 작업에서 시작해 친구들과 협업을 거쳐 확장된 거예요. 그동안 아티스트 프루프에서 해온 활동을 아카이빙하는 동시에 앞으로 해나갈 작업을 살짝 보여주는 전시이자 실험판이라고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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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프루프 숍 전경

아티스트 프루프의 오리지널 아트워크, 판화나 페인팅, 오브제, 모빌 그리고 그 외의 파생 상품들을 판매하고 전시하는 AP SHOP은 길을 걷다 우연히 들어가는 숍이 아니다. 실제 이곳을 찾는 손님의 90%가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고 온다. 그러니까 건물 내 현관문 잠금장치의 비밀번호를 홈페이지에서 미리 확인했거나 컬러 아크릴판으로 꾸민 인터폰을 사용해 비밀번호를 물어볼 수 있단 걸 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진입 장벽이 높진 않다. 아티스트 프루프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곳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감지한 각국의 그래픽디자이너나 일본, 중국 등에서 온 감 좋은 여행자도 자주 방문한다고.
다른 의미에서 아티스트 프루프의 인스타그램은 팔로우할 만한데, 한 달에 한 번 이곳에서 열리는 ‘AP SHOP LIVE’의 소식을 가장 빠르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숍의 운영이 끝나는 밤, 33㎡의 작은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트럼펫 연주자 이동열을 주축으로 한 소규모 연주회는 AP SHOP을 즐기고 기념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이곳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이 궁금하다면, 지금 유튜브나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이동열과 기타리스트 김기은이 듀오로 연주한 앨범 <아일랜드(Island)>를 재생하면 된다.
AP SHOP은 번잡한 도심에 위치했음에도 고요하며 비밀스러운 아지트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평일과 주말, 낮과 저녁, 언제든 한적함과 여유가 충만한 공간. 여기에 음악가가 선곡한 음악이 운치를 더한다. 진공 상태의 우주에서 음악을 들으면 이런 기분일까? 이동열이 ‘도심의 오아시스’라고 부르는 이곳은 어쨌든 서울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곳임이 분명하다. 고요한 경험과 세상에서 몇 개 없는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기념품을 구매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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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SHOP LIVE 포스터

아티스트프루프

AP SHOP의 전시를 위해 최경주 작가가 뜨개질로 만든 공

주소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5길 9, 301호
홈페이지 www.artistproof.org
인스타그램 instagram.com/artistproof_shop
2019. 3 에디터:김혜원
포토그래퍼:박성영

Where to stay?

LOTTE HOTELS & RESORTS
  • 2019. 3
  • 에디터: 김혜원
  • 포토그래퍼: 박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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