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제임스 진을 향한 끝없는 여정
일러스트레이터로 시작해 순수 미술과 상업 미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제임스 진의 전시가 지금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그의 전시 중 가장 큰 규모다. 제임스 진이 만든 몽환적이고 기묘한 세계에서 그를 직접 만났다.
당신이 그래픽 노블이나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한다면, 혹은 패션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제임스 진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제임스 진은 20대 초반 DC코믹스의 ‘페이블스(Fables)’ 시리즈 커버 아티스트로 처음 이름을 알렸다. 당시 그는 스토리와 독창적 아이디어를 하나로 집약한 커버 작업으로 미국 만화계의 권위 있는 상을 여럿 수상하기도 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출발한 그는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페인팅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제임스 진은 패션과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순수 미술과 상업 미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신비롭고 예술적인 에메랄드빛 포스터 또한 그의 작품이다.
제임스 진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2017

“제 작품을 통해 저를, 끝없는 여정을, 그리고 독창성(Creativity)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티스트 제임스 진
하지만 제임스 진의 이름을 지금 처음 들어봤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를 가장 잘 소개하는 전시가 현재 서울에서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롯데뮤지엄의 제임스 진 전시 <끝없는 여정>은 지난 20년간 그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하는 전시다. 뉴욕, 도쿄, 로스앤젤레스 등 지금까지 연 제임스 진 전시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스케치북 드로잉부터 ‘페이블스’ 시리즈 커버, 영화의 오리지널 포스터, 그리고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 제작한 대형 회화 6점까지, 총 500여 점의 작품이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대학 시절 뉴욕 도서관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수없이 드나들며 연구했다는 인체 드로잉 스케치를 보면 그의 섬세함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며 만들어나간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그 어딘가의 세계가 전시장에 펼쳐진다.
제임스 진

디센던츠-블루 우드, 캔버스에 아크릴, 335.2×1097.2cm, 2019 ⓒ 2019 James Jean

망각의 강 레테를 연상케 하는, 혹은 제임스 진의 어린 시절로 떠나는 시간의 강 같은 어두운 통로를 지나면 벽을 가득 메운 ‘디센던츠-블루 우드(Descendents-Blue Wood)’를 마주하게 된다. 10m 길이의 초대형 회화로 오방색을 주제로 한 6점의 신작 중 하나다. 구름과 만개한 꽃 사이를 떠다니는 듯한 소년들. 그의 그림은 보는 순간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유려한 선과 세밀한 묘사, 독특한 색감이 세련되게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혹적인 이미지 이면에는 보이는 것과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제임스 진을 “내러티브 세계의 예술가”라고 표현한다. 제임스 진이 겹겹이 쌓아놓은 작품 속 상징과 은유를 찾는 것은 흥미롭다. 그리고 작품 속 기묘하면서도 아름다운 세계를 보다 보면 제임스 진이 더욱 궁금해진다.
제임스 진

제임스 진

제임스 진

제임스 진

롯데뮤지엄에서 만난 제임스 진

Q. 당신은 어떤 아이였나요?
A. 저는 대만에서 태어나서 만 3세 때 미국으로 왔어요. 뉴저지에서 자랐지만 제가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죠. 고립감을 느꼈고, 제 내면 세계에 집중하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외부로부터 저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때도 종종 있었죠. 10대 때에는 만화책에 빠져 살았어요. 뮤지엄이나 회화 같은 것은 잘 몰랐고, 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기에 저에겐 만화책이 유일한 예술적 창구였죠. 드로잉과 영어를 배운 것도 만화책을 통해서였고요.

Q. 서구적이면서도 동양적인 소재와 표현 방식이 대만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자란 당신의 성장 배경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A. 저는 아시아인도, 미국인도 아니에요. 사실 그 어느 쪽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해요. 아시아와 미국의 경계에서 배회하며 저의 감성과 가장 잘 맞는 방법과 도구를 활용해 작품을 만들 뿐이죠. 저에게 많은 영감을 준 이탈리아 출신의 청나라 궁정 화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의 그림처럼 제 작품에서도 동서양의 문화가 접목되어 있어요. 저는 작품 속에서 현실의 고민이 아닌 상상의 세계를 표현해요. 시간이 지나 저의 작품 세계가 성숙해지면, 제 내면에서 일어나는 문화 충돌을 좀 더 직접적이고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거예요.

Q.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한 신작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오방색을 기초로 한 대형 회화 6점인데요, 작품들을 보면 연속된 이야기의 한 장면을 포착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요.
A. 처음부터 ‘긴 여정’에 관한 전시를 만드는 것으로 기틀을 잡았고, 롯데뮤지엄의 길고 거대한 벽을 보자마자 길게 연속되는 이미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그렇게 와이드한 파노라마 형식의 작품을 기획했죠. 그리고 저는 작품을 할 때 항상 내러티브, 캐릭터, 배경이나 주변 환경을 설정하곤 해요. 신작은 한국에 맞게 오방색을 주된 콘셉트로 진행했고, 그것이 전시의 씨앗이 된 셈이에요.
제임스 진

에이비어리-레드 파이어, 캔버스에 아크릴, 304.8×624.8cm, 2019 ⓒ 2019 James Jean

Q. 색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작품에서 빨강, 파랑 등의 색깔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점이 꽤 인상적인데요.
A. 인간은 이따금 너무나 많은 자유 앞에서 오히려 무력해지죠. 저는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틀을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했어요. 오방색은 출발점일 뿐이었죠. 색과 구성 요소의 간단한 콘셉트를 잡은 뒤 캐릭터들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어요. 예를 들어 ‘패시지-블루 우드(Passage-Blue Wood)’는 주제가 되는 색은 파란색이고 요소는 나무예요. 하지만 하늘은 오렌지색이고 바다는 녹색이죠. 파란색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아요. 다른 색을 쓰면서 파란색과 대조 효과가 났고, 예상치 못한 놀라운 결과를 만들 수 있었어요.

Q. 색은 당신의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 중 하나죠. 평소 색깔은 어떻게 선택하는지 궁금해요.
A. 컬러 팔레트를 선정하는 작업에 꽤 집중하는 편이에요. 그림 속 대상들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길 원해 색을 선택하고 배치하는 것에 공을 많이 들여요.
제임스 진

월풀-블랙 워터, 캔버스에 아크릴, 304.8×1005.8cm, 2019 ⓒ 2019 James Jean

Q. 대형 회화 작업을 하며 섬세함을 유지하기에 힘들지 않았나요?
A. 스케일이 큰 그림을 그릴 땐 가까이 있는 것과 멀리서 보는 것 둘 다 필요해요. 가까이에서 많은 요소를 넣고 빼고, 저 뒤에 서서 전체적인 것을 보는 거죠. 온몸을 그 안에 소진시켜야 해요. 굉장히 육체적인 일이죠.

Q. 하루에 몇 시간 정도 작업하나요?
A. 작업에서 거의 손을 놓지 않아요. 예전에는 온종일 작업에 매달렸어요. 하지만 가족이 있는 지금은 보통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로 스케줄을 세워놓죠. 그게 일반적인 작업실 스케줄이에요. 오후 7시가 되면 가족과 저녁을 먹고, 9시 반에서 10시쯤이면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어요. 그러면 10시부터 새벽녘까지 조금 더 작업하고, 저도 잠을 자요.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반복하는 거죠.(웃음)
제임스 진

‘디센던츠-블루 우드’와 제임스 진 © 롯데뮤지엄

Q.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소년 캐릭터인 ‘디센던츠’는 무엇을 대변하나요?
A. 저는 소년 캐릭터를 오랫동안 그려왔는데, 한동안 제 그림에서 잠시 사라졌어요. 하지만 저의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 소년도 돌아왔죠. 이름도 없었던 그 소년은 아이의 순수함과 주변 세계의 위험함을 동시에 대조적으로 보여주죠.

Q. 꽃 역시 자주 등장하는 오브제예요.
A. 꽃을 좋아해서 집에도 꽃이 많아요. 제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꽃의 겹쳐진 패턴과 모양, 꽃 자체를 반영하는 것 같아요. 꽃의 중의적 의미를 좋아하기도 하고요. 아름답고 생명력 있지만 금방 지는 그 속성요.

Q. 아름다운 이미지 안에 아름답지만은 않는 이야기를 담는 당신의 작업과도 닮았어요.
A. 여러 개의 결과 층으로 이루어진 구성을 좋아해요. 오랜 시간 그 의미를 읽을 수 있는 것들을요. 그림이나 다른 종류의 요소로서 그것들을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시간이 지나서 생겨나는 이야기도 갖고 싶고요. 보통은 이미지의 아름다움이 먼저 보이도록 하고 그런 다음 그 안에 담긴 어렵고 어두운 이야기가 나오도록 하죠.
제임스 진

아우렐리안즈(Aurelians), 캔버스에 아크릴, 152.4×183cm, 2016 ⓒ 2019 James Jean

Q. 작품의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얻나요?
A. 뉴스나 팟캐스트, 다른 전시 등에서 꾸준히 영감을 받곤 해요. 물론 제 작품에서도요. 제 작업에 대한 어떤 반응은 그림을 그리는 데 흠뻑 빠지도록 영향을 미치기도 하죠. 특별히 작품과 관련해 정해놓은 틀은 없고, 새로운 가지를 넓은 범주에 두고 작업을 이어나가는 편이에요.

Q. 서울에서는 어떤 인상을 받았나요?
A. 사실 서울에서 많은 곳을 가보지는 못했어요. 서울의 여러 곳을 탐험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거의 전시장에만 있었네요. 하지만 서울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고 흥미로운 텍스처가 많은 도시라는 걸 느꼈어요. 저에게 친숙한 음식도 좋고요.

Q. 영감이 작업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궁금해요.
A. 저의 모든 작품은 드로잉에서 시작해요. 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하죠. 하지만 작업이 진행되면 초기의 아이디어는 변형되고 결국 저의 의식이 통제하기 어려운 형태로 탈바꿈하곤 하죠. 손 글씨를 보면 사람마다 특유의 필체가 있는 것처럼,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억지로 드로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이미지가 어떠한 형상을 갖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선을 그리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죠. 이러한 과정을 거치다 보면 저에게 영감을 준 모든 요소가 저의 복잡한 사고와 상상력을 통해 어느 순간 시각화되어 표현돼요.
제임스 진

피기백(Piggyback), 종이에 볼펜, 29.8×21.6cm, 2014 ⓒ 2019 James Jean

Q. 이번 전시가 당신이 지난 20년 동안 해온 작업을 총망라하고 있어요. 그동안 작업한 결과물을 모아보니 어떤가요?
A. 조금만 더 쉴 걸 하는 생각?(웃음) 모든 작품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아주 멋진 일이에요. 사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 인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20년이 지난 뒤에 모든 것을 뮤지엄에서 한 번에 볼 수 있다니, 정말 멋지지 않나요? 제 자신이 슈퍼히어로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Q. 20년 전과 지금의 당신은 많이 다른가요?
A. 그럼요. 제 자신이 바뀌기 위해 노력했으니까요. 최근에 열세 살, 열다섯 살에 작업한 글과 스케치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와, 내가 이렇게 똑똑했단 말이야?’ 사람들에겐 누구나 잠재력이 있지만 살면서 어떤 건 개발되고 어떤 건 사라지잖아요. 글 쓰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걸 더 좋아했는데, 어릴 때 쓴 글을 보니 생각보다 잘 써서 놀랐어요.

Q. DC코믹스의 ‘페이블스’ 시리즈 커버 작업, 패션 브랜드 프라다(Prada)와의 협업, 할리우드 영화 포스터 작업 등의 결과물도 전시장을 채우고 있어요.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과 함께한 경험이 당신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해요.
A. 모든 경험이 제 작품에 영향을 주었지만, 특히 상업 작업을 통해 다양한 테크닉을 배웠어요. 서로 다른 기술을 접목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고, 그것들을 결합하는 방법을 배우는 기회가 되기도 했죠. 상업 작업은 현재의 작업으로 저를 이끈, 하나의 실험실이었어요. 사실 일러스트레이터로 이름이 알려질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는데, 그런 경험이 저를 아주 멀리까지 밀어줬죠.

Q. 전시에서 꼭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 있나요?
A.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든 ‘가이아-옐로우 어스(Gaia-Yellow Earth)’요. 3D 입체형 스텐인드글라스를 처음 만들었거든요. 저의 드로잉이 스테인드글라스로 탄생한 것도 신기하지만 계속해서 투명함을 유지하는 것도 놀라워요. 상부의 결합 역시 흥미롭고요. 이 모든 게 결합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림은 전통적 미술 기법이지만 입체적으로 제작할 때에는 기술적 혁신이 있었어요. 이 기술적 혁신이 저에게 좋은 경험이었죠.
제임스 진

가이아-옐로우 어스, 유리와 납, 철, 236.2×132.1×132.1cm, 2019 ⓒ 2019 James Jean

Q. 이 작업은 어떻게 시작한 건가요?
A. 우연히 시작된 흥미로운 이야기예요. 예전에 창문 하나를 만드는 일을 소개받은 적이 있어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요. 그곳은 도서관처럼 조금 작은 캘리포니아의 오래된 건물이었죠. 하지만 예산 문제로 프로젝트가 무산되고 나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는 회사인 저스틴 스튜디오(Justin Studio)에서 연락이 왔어요. “우리는 여전히 당신과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고 싶은데, 경제적인 면은 걱정하지 말고 한번 해보자” 하고. 그때 저스틴 스튜디오과 함께 스테인드글라스 3개를 만들었어요. 신선한 아이디어와 숙련된 장인의 조합이었죠. 이번 전시에서도 색과 재료가 지닌 의미가 잘 어우러진, 좋은 결과물이 나왔어요.

Q. 새로운 도전을 즐기나요?
A. 어떤 작품을 도전할 때는 어렵게만 보이지만 막상 끝내고 나면 예뻐 보이고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후에 더 어려운 걸 해내고 나면 도전 자체의 비전이 커지는 느낌이에요.

Q. 관람객들이 이번 전시를 어떻게 봐주길 바라나요?
A. 많은 이가 작품을 통해 저를, 끝없는 여정을, 그리고 독창성(Creativity)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전시장 내부를 천천히 걸으면서 차분하게 명상을 하듯,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림과 함께라면 제 마음의 풍경도 느낄 수 있을 테고요. 각자의 다른 감정을 충분히 경험하고 각기 다른 결과 층을 즐기길 바랍니다.

Q.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해요.
A. 진정한 저의 생각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남아 있는 작품으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요.
제임스 진

제임스 진 <끝없는 여정> 전시장 전경 © 롯데뮤지엄

전시 기간 2019년 4월 4일~9월 1일
장소 롯데뮤지엄
홈페이지 www.lottemuseum.com

영상 © 롯데뮤지엄

2019. 5 에디터:김혜원
포토그래퍼:박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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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5
  • 에디터: 김혜원
  • 포토그래퍼: 박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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