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대전 엑스포다리 야경 © Shutterstock

[BRIEF HISTORY] 대전이 품고 있는 시간
대한민국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대전은 교육의 허브이자 첨단 과학기술의 메카다. ‘한밭’이라 불리는 대전은 과연 어떤 역사를 품고 있을까?
01
BC 10C: 대전에도 구석기(오봉산 남쪽 면과 둔산동)와 신석기(둔산동) 유적이 일부 존재한다. 하지만 기원전 1,000년경 시작된 청동기의 흔적은 둔산동, 궁동, 내동, 탄방동, 유성구 원내동, 보문산 등 대전의 많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내동의 유적들은 한반도에서 가장 빠르고 높은 수준의 청동기 문화가 대전에서 꽃피었음을 보여준다.
02
AD 3C: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면서 원시 국가가 형성된다. 대전 일대를 차지한 나라는 신흔국으로 추정된다. 기원후 1~3세기에는 신흔국을 포함해 한강 유역과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54개의 작은 나라가 연합해 마한을 구성했다. 이들은 4세기까지 차례로 백제에 통합되었다.
03
498: 백제는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성이 무너지고, 개로왕이 목숨을 잃었다. 옹진(공주)으로 천도한 백제는 여러 성을 쌓아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에 대비했다. 498년에는 전략적 요충지인 대전 동구 사정동에 사정성을 축조했다. 현재 대전에는 48개소의 산성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수치다.
04
660: 백제 시절 대전은 우술군에 해당했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해 백제가 멸망하자 여기저기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대전의 백제 부흥군은 보은, 옥천, 대전, 유성, 공주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아 나당연합군의 군량 수송을 방해했다. 하지만 비래동의 지라성, 사정동, 흑석동, 월평동의 산성이 차례로 함락되면서 백제의 부흥 운동은 막을 내렸다.
대전

신분철폐를 주장한 최초의 민중봉기를 기념하는 명학소 봉기 기념탑 © 연합뉴스

05
1176: 신분제 타파의 기치를 내건 망이, 망소이의 봉기는 ‘공주 명학소의 난’으로도 불린다. 그런데 공주 명학소는 당시 공주목 영속 군현이던 대전의 탄방동, 괴정동, 갈마동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전은 조선 시대에도 공주목에 속했다.
06
1715: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는 조선 사림의 가장 큰 두 줄기다. 기호학통의 대표적 터전은 공주이며, 대전은 공주군과 진잠군의 일부에 속했다. 1715년, 송시열의 외손자인 권이진이 대전 중구 무수동에 유가 학당인 여경암을 설립했다. 여경암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누구나 둘러볼 수 있다.
07
1898: 일본은 1898년 9월, 부산에서 신의주를 잇는 간선인 경부철도 부설권을 얻었다. 서울-수원-천안-공주-부산으로 예정되었던 노선은 유생들의 반대로 양반의 도시 공주 대신 대전을 거치도록 변경되어 1900년 3월에 확정되었다.
대전

1977년 대전역의 모습 © 대전시 사진 아카이브 대전찰칵 photo.daejeon.go.kr

08
1904: 6월 대전역이 완공되었고, 11월 10일에는 경부철도가 준공되었다. 대전역 열차는 1905년 5월 25일에 정식으로 개통했다. 1914년에는 호남선까지 대전을 지나게 되었다. 1800년대 인구 3,000명의 작은 시골 마을은 대전역이 들어서면서 교통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09
1907: 조선 사람들은 검은 연기를 내뿜는 기차에 거부감을 지녀서 철로 파괴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와 달리 일본인은 철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대전천과 대동천의 합류 지점에 일본인 88인이 정착했고, 1907년에는 일본인이 유성온천을 개발했다. 1909년에는 2,500명 이상의 일본인이 원동, 중동, 정동에 일본식 시가지를 만들고 거주했다.
10
1914: 대전의 철도 운송이 금강을 이용한 수상 운송을 대체하면서 새로운 행정도시 건설이 논의되었다. 1914년, 공주목 직할의 일부, 회덕현과 진잠현을 통폐합한 대전군이 신설되었다. 군청도 대전에 만들어졌으며, 1917년에는 대전면이 신설되었다. 이후 대전에는 미쓰이물산의 공장과 일본 신사가 들어서기도 했다.
대전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옛 충남도청사 건물 © 연합뉴스

11
1932: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했다. 충남도청은 2012년 홍성의 내포신도시로 이전했지만 일제강점기의 관공서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옛 도청청사는 현재 등록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임시 중앙청과 육군본부로 사용했으며, 영화 <변호인>에도 배경으로 등장한다.
12
1949: 대전시로 승격했다. 이후 대전은 꾸준히 발전해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서부 지역인 둔산신도시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인구도 계속 늘어나 1989년에는 직할시가, 1995년에는 광역시가 되었다. 한편 도시의 중심이 서쪽으로 넘어가면서 쇠락했던 구도심은 문화의 거리로 재탄생했다.
13
1950: 한국전쟁 발발 사흘 만인 1950년 6월 28일, 정부는 대전으로 옮겨왔다. 피란민들이 정부를 쫓아오면서 인구 13만의 대전은 갑자기 1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로 바뀌었다. 7월 16일까지 17일간 대한민국 임시 수도이던 대전에선 국군과 인민군이 퇴각할 때마다 번갈아가며 민간인 집단 학살이 벌어졌다. 대전형무소와 프란체스코수도원(현재의 거룩한말씀의수녀회 성당)이 당시 비극의 현장이었다.
대전

1969년 대전 천안간 고속도로 개통 © 대전시 사진 아카이브 대전찰칵 photo.daejeon.go.kr

14
1974: 1973년 입안되어 1974년부터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7개년 계획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석유파동 등이 겹치면서 실제 대덕연구단지는 1980년대 중반부터 활기차게 건설되었다. 2005년 대덕단지는 연구개발특구로 지정되어 우리나라의 첨단 과학기술을 이끌고 있다.
대전

1979년 대전역 상공에서 내려다본 중앙로 모습 © 대전시 사진 아카이브 대전찰칵 photo.daejeon.go.kr

15
1997: 수도권 집중화를 막고 국토 균형 발전을 이루자는 취지에서 청와대와 근접하지 않아도 되는 통계청, 조달청 등 10개 정부 기관이 둔산동의 대전정부종합청사로 1997년에 이전했다. 이후 둔산동에 대전광역시청, 대전고등법원, 대전지방검찰청, 특허법원 등의 관공서가 몰리면서 행정도시로서 대전의 위상도 높아졌다.
롯데시티호텔대전

롯데시티호텔대전

대전에서 머물 곳: 롯데시티호텔대전
 
대전 시내를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갑천이 흐르고, 낮지만 다부진 인상을 지닌 우성이산이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는 롯데시티호텔대전은 대전을 상징하는 엑스포 과학공원 바로 옆에 자리한다. 지상 18층 높이에 총 304개의 객실을 갖춘 롯데시티호텔대전은 대전을 찾는 비즈니스 고객은 물론 여행객까지 누구라도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최고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자랑한다. 객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갑천과 한밭수목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주소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 엑스포로 123번길 33
전화 +82-42-333-1000
홈페이지 www.lottehotel.com/daejeon-city
2019. 5 에디터:하재경
글: 이중한

TOPICS IN THIS ARTICLE

Where to stay?

LOTTE HOTELS & RESORTS
  • 2019. 5
  • 에디터: 하재경
    글: 이중한
  • 트위터로 공유
  • 페이스북으로 공유
  • 핀터레스트로 공유
  • 링크URL 공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