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사마라 전경 ⓒ Shutterstock

[BRIEF HISTORY] 변화하는 도시, 사마라
작은 요새에서 세계 양강의 최대 공업도시, 첨단 우주항공 도시, 2018 월드컵 개최지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도시 사마라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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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3: ‘사마라’라는 명칭은 수백 년 뒤 역사에 등장한다. 하지만 볼가강과 사마라강의 합류지점에 사람이 거주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1243년, 칭기즈칸의 손자바투는카스피와 흑해 연안에 자리한 러시아를 정복하고 킵차크한국을 세웠다. 킵차크한국은 천막을 황금으로 둘렀기 때문에 금장한국이라고도 한다. 사마라 일대도 몽골인의 황금 장막에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다.
02
1480: 몽골은 240년간 러시아를 가혹하게 지배했다. 몽골의 속국인 모스크바 공국은 꾸준히 힘을 기른 반면 킵차크한국은 다섯 개의 한국으로 분열되었다. 나라 이름이 한국, 칸국 또는 카니예테라로 끝나면 몽골이나 투르크몽골계 국가다. 1480년,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3세가 몽골을 격파하면서 러시아는 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난다.
03
1547: ‘뇌제’라고 불리는 이반4세가 즉위했다. 그는 1552년 카잔한국을 병합하고,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한국을 정복했다. 사마라를 비롯한 볼가 지역은 조금씩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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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6: 이반4세의 아들 표도르1세가 사마라에 요새를 건설했다. ‘사마라’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 순간이다. 사마라는 ‘여름’을 뜻한다.
05
1780: 사마라에는 5km의 아름다운 제방 길이 있다. 1780년, 제방을 쌓으면서 사마라는 작은 요새에서 항구도시로 발전했다. 사마라는 중앙아시아와 유럽, 시베리아를 잇는 요충지가 되었다. 사마라의 정부 기관과 법원 등 행정시설은 1780년에서 1782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이베르크키 수녀원

이베르크키 수녀원 ⓒ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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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 사마라의 인구가 5만 명을 넘어섰다. 한때 360명의 수녀가 거주한이베르스키 수녀원도 1850년에 세워졌다. 1991년에 복원한 이베르스키 수녀원은 19세기의 아름다운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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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 19세기 중반을 넘어가면서 독일인, 유대인,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등 다양한 이주민이 사마라를 찾았다. 금장과 대리석이 화려하게 어우러진 러시아정교 신자들의 성모주교좌 사원, 이주 독일인들의 절제된 미학이 돋보이는 루터 교회가 모두 1860년에 건설되었다. 1910년에는 유대교의 시너고그도들어섰다. 러시아에서 가장 큰 모스크도 사마라에 있다. 사마라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다종교 도시다.
08
1877: 오렌부르크와 사마라를 연결하는 기차가 개통했다. 부두에 입항하는 수천 척의 선박과 철도가 교차하면서 물류도시의 위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교외도 거주지로 개발되면서 도시 규모 역시 확대되었다. 101m 높이의 사마라역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철도역이다.
09
1881: 사마라는 러시아의 맥주 수도로 불린다. 오스트리아 귀족이 볼가강 동쪽 지역에 맥주 양조장을 열었는데, 1917년 소비에트 혁명군이 양조장을 압수하고 맥주 이름도 지글로프스코예로 바꾸었다. 지글로프는 소비에트 시대의 대표적 맥주인 동시에 초콜릿, 로드닉 보드카와 함께 사마라 식품공업의 상징이다. 지금도 지글로프 공장은 운영하고 있다.
쿠이비셰프 동상

쿠이비셰프 동상 ⓒ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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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1917년 반란을 일으킨 소비에트 혁명군이 이듬해 사마라를 접수했다. 1935년, 사마라 평의회 의장 출신의 소비에트 혁명 지도자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그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쿠이비셰프시로 바꾸었다. 1991년까지 사마라는 쿠이비셰프시였다. 쿠이비셰프 광장은 현재까지도 유럽에서 가장 넓은 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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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소비에트연합이 독일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러시아는 1941년에서 1945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기간을 ‘대조국 전쟁’이라고 부른다. 소련은 사마라를 임시 수도로 삼아 모스크바 함락에 대비했다. 사마라의 인구는 40만에서 60만으로 급증했다. 187개의 군수공장도 이전했다.
12
1942: 1990년 가을, 사마라의 지역 신문에 ‘스탈린의 192계단’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면서 스탈린의 벙커가 거의 반세기 만에 세상에 공개되었다. 1942년 2월부터 9개월간 파내려간 지하 37m의 스탈린 벙커는 히틀러나 처칠의 벙커보다 규모와 완성도가 높다. 6개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4개는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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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도시 위쪽에 수력발전소가 완공되었다. 여기에서 공급된 전기는 사마라의 공장을 가동시켰다. 사마라는 러시아의 핵심 공업도시 가운데 하나다. 지금도 러시아 베어링의 4분의 1, 케이블의 70%를 사마라에서 생산한다.
사마라

사마라 우주 전시 센터 ⓒ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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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대조국 전쟁 당시 사마라의 군수공장은 IL-2(일류신-2: 소련의 대표 전투기) 생산의 80%를 담당했다. 1942년 국립우주항공대학을 개교하는 등 꾸준한 노력의 결과 사마라는 소련 우주항공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957년에는 사마라에서 인류 최초의 우주로켓 R7(스푸트니크 1호)이 발사되었다. 최초의 소유스 우주선은 1966년 11월 28일 발사되었다. 다음해 4월 23일에는 최초의 유인 발사도 이루어졌지만 귀환 도중 재진입 실패로 우주비행사가 사망했다. 최초의 유인 우주선 발사대를 갖춘 우주항공 도시였기에 냉전 기간 사마라는 외국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15
2018: 사마라의 최대 인구는 1979년의 120만 명이었다. 공업 도시이자 물류 도시로 화려한 시기를 보낸 사마라지만 소련 붕괴 이후 산업까지 무너지면서 20년간 경제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경기가 안정화되어 도시도 활력을 찾았다. 2018년에는 월드컵을 개최, 6경기가 열리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객실에서 볼가강과 도심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롯데호텔사마라도 문을 열었다.

사마라에서 머물 곳: 롯데호텔사마라
사마라 최초의 5성급 호텔, 롯데호텔사마라는 도시 중심부에 자리해 이용이 편리하다. 볼가강이 내려다보이는 193개의 객실은 최신 설비를 갖춘 현대적 디자인으로 꾸며 머무는 동안 최상의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특히 롯데호텔사마라는 컨퍼런스 미팅을 위한 최고의 설비와 서비스를 제공한다. 1,400명까지 수용 가능한 12개의 컨퍼런스 룸을 갖추고 있어 비즈니스 세미나에서 국제 포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비즈니스 미팅과 연회를 개최하는 데 적합하다.
주소 110, Samarskaya Street, Samara, Russia Lotte Hotel Samara
전화 +7-846-920-10-00
홈페이지 www.lottehotel.com/samara-hotel
2019. 6 에디터:하재경
글: 이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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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6
  • 에디터: 하재경
    글: 이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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