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잔 왕 ‘Artificial Rock’ / © Robert Berg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포도원이 아트를 만날 때, 도넘 에스테이트
수준 높은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와이너리는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와인과 예술을 동급에 두고 운영하는 곳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캘리포니아 소노마 밸리에 있는 도넘 와이너리에 대한 얘기다.
샌프란시스코의 북쪽, 금문교를 건너 차로 약 40분을 달린다. 푸르고 느긋한 전원 풍경이 펼쳐진다면 소노마(Sonoma)에 이른 것이다. 소노마 밸리는 나파 밸리와 함께 캘리포니아의 대표적 와인 산지로서 미국의 대통령 만찬주로 애용되며, 특히 뛰어난 피노 누아를 생산하는 청정 자연환경으로 유명하다. 그 안에 자리 잡은 도넘 에스테이트(The Donum Estate, 이하 도넘) 와이너리는 와인 애호가뿐 아니라 예술 애호가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81만㎡(약 24만 평)가 넘는 포도원에 세계적인 조각가들의 작품이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평온한 와이너리 한가운데 설치된 마크 맨더스의 ‘Composition with Long Verticals’ / © Gregory Gorman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세계 각지의 아티스트들이 그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앨런 워버그
성공한 사업가, 아트에 눈을 뜨다
2010년 도넘의 새 주인이 된 앨런 워버그(Allan Warburg)는 아주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덴마크 태생인 그는 개방적인 부모님을 따라 어려서부터 아시아를 여행했고 그 덕에 이국 문화의 매력에 일찍 눈을 떴다.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중국어를 배웠고, 나중엔 아예 윈난성의 대학에 등록했다. 중국어를 마스터한 그는 무역 일을 구해 중국에 자리 잡게 된다. 그의 사업가적 기질은 이때 빛을 발휘한다. 1990년대 중반, 서서히 변화가 감지되는 중국 시장에서 유럽풍 패션 비즈니스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는 친구와 의기투합해 덴마크의 한 패션 그룹을 파트너로 끌어들인 다음 그들의 브랜드를 중국에 론칭했다. 당시 서양 패션을 들여온 첫 주자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몇 년 후 브랜드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고, 중국에서라면 누구나 알 만한 다른 패션 브랜드들도 끌어안는다. 중국 본토뿐 아니라 홍콩, 대만, 말레이시아에 7,000여 개의 매장을 운영하며, 직원 5만 명을 거느린 갑부가 된 것이다.
그가 살던 곳이 북유럽의 어느 도시였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 당시 베이징에 있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발전하는 중국 현대미술계의 산증인이 된다. 오래된 전자 및 군수품 공장들이 아티스트들의 스튜디오와 갤러리로 바뀌었고 그 안에서 아티스트의 창작력은 폭발했다. 그 환상적 에너지에 매혹되어 작품을 하나둘 사들이기 시작했고, 아티스트들과도 친분을 쌓게 된다. 이때까지 그는 도넘의 와인을 즐겨 마시는 와인 애호가이자 이제 막 수집의 재미를 알아가는 아트 컬렉터일 뿐이었다.

MH 아키텍에서 디자인한 테이스팅 룸 건물 / © MH Architects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포도원에 아트를 도입하다
또 한 번의 전기가 찾아왔다. 잘 아는 유럽의 와인 수입업자를 통해 소노마의 도넘 와이너리가 새 주인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이번에도 사업가의 촉이었다.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기회임을 알았다.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토양인 것을 확신했고, 그에 비하면 대지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 몇 년 잘 운영해서 나중에 되팔 생각도 이미 계산돼 있었다. 그렇게 2011년, 앨런 워버그의 이름을 건 새로운 도넘 와이너리가 세상에 공개된다. 
 

라벤더 밭과 조화를 이룬 소피압 피치의 ‘Morning Glory’ / © Robert Berg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라틴어로 ‘선물’을 의미하는 도넘의 이름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 된 건 시간이 좀 더 흘러서다. 그의 생각이 예기치 않은 방향을 향한 것이다. 홍콩에 거주하며 여전히 아시아에서 패션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1년에 몇 번씩만 소노마를 찾았는데, 그때마다 전혀 다른 풍경과 자연에 감화되었다. 오래전 낙농업을 하던 도넘의 대지에는 완만하게 구릉진 언덕과 아담한 호수, 가축을 기르던 우리 등의 풍경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또 백 년 넘은 올리브나무, 향기로운 프렌치 라벤더밭, 무성한 유칼립투스 숲은 그곳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무려 200여 종의 철새가 오가는 길목이라는 점도 우연 같지 않았다. 사시사철 온화한 이 특별한 캘리포니아의 자연을 무대로 세계적인 조각 컬렉션을 들인다면 와인뿐 아니라 예술의 성지가 되리란 예감이 들었다.

가오 웨이강의 ‘Maze’ / © Robert Berg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아이웨이웨이 ‘Circle of Animals / Zodiac Heads’ / © Robert Berg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웨민쥔 ‘Contemporary Terracotta Warriors’ / © Gregory Gorman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광활한 자연에 울려 퍼지는 예술가의 목소리
이미 잘 알고 있는 중국 현대미술 작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개인적으로 구입한 첫 조각품 역시 초현실적 구상 조각으로 알려진 중국의 현대작가 잔왕(Zhan Wang)의 작품이었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렇게 포도원의 도입부에는 중국뿐 아니라 세계 현대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 아이웨이웨이(Ai Weiwei)의 ‘동물 원형/ 십이궁 두상(Circle of Animals/ Zodiac Heads)’(2011)이 서게 된다. 이 작품이 십이지신상을 재현했지만 서양의 체스 말을 닮은 모습으로 관객의 흥미를 유발한다면, 포도원의 한가운데에서는 잔왕의 ‘Artificial Rock No. 126’(2007~2013)이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햇살을 받으며 솟구치듯 서 있다. 작품은 주어진 자연환경을 세심하게 고려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이루도록 계획됐다. 과장되게 웃는 얼굴 안에 사회적 번민을 담은 웨민쥔(Yue Minjun)의 브론즈 소재 ‘컨템퍼러리 테라코타 전사들(Contemporary Terracotta Warriors)’(2005)이 고즈넉한 정서의 올리브나무 행렬과 대구를 이룬다면, 모던한 금속으로 작업하는 가오웨이강(Gao Weigang)의 설치미술 작품 ‘미로(Maze)’(2017)는 그때그때의 빛과 날씨를 반영하며 풍경의 일부가 된다.

마치 영화의 라스트신처럼 느껴지는 엘름그린&드라그셋의 'The Care of Oneself' / © Adrian Gaut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7미터가 넘는 하트 모양의 조각인 리처드 허드슨의 ‘Love Me’ / © Gregory Gorman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도넘의 조각 컬렉션은 평소 다른 문화권에 관심이 많은 주인의 개방적 성향이 반영돼 있다. 그는 예술이 문화와 연결되는 길이라고 믿는다. “세계 각지의 아티스트들이 그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2018년, 40점 정도 모은 도넘의 조각 컬렉션을 정식 론칭하며 그가 한 말이다.

루이즈 부르주아 'Crouching Spider' / © MH Architects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이를 증명하듯 도넘의 조각 공원에서는 중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온 현대미술가의 작품이 저마다 묵직한 울림을 발휘하고 있다. 프랑스 태생이자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여성 조각가로 알려진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웅크린 거미(Crouching Spider)’(2003)가 망을 보듯 포도밭의 중앙에 거대하게 놓여 있고(작품이 스틸 소재인 것을 고려해 주인은 별도의 전시 공간을 지었다), 고요한 호숫가에서는 북유럽 듀오 엘름그린&드라그셋(Elmgreen & Dragset)의 ‘자기 자신에 대한 보살핌(The Care of Oneself)’(2017)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속에 현대인의 자화상을 녹여냈다. 영국 작가 리처드 허드슨(Richard Hudson)의 거대한 하트 모양 ‘러브 미(Love Me)’(2016)는 포도원 어디에서나 보이는 언덕 꼭대기에 서서 거울 같은 표면으로 주변 환경을 품고 있다.  

테이스팅 룸 전경. 정면의 설치 작품은 구사마 야요이의 ‘Pumpkin’ © MH Architects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테이스팅 룸 실내 © MH Architects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핑크색 설치 작품은 린다 벵글리스의 ‘Pink Ladies’ / © Robert Berg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테이스팅 룸의 예술가들
다양한 아트 컬렉션을 위해 테이스팅 룸 건물도 가세했다. 예전에 이곳에 있던 농가를 모티프로 일부러 소박하게 지은 백색 건물이다. 구사마 야요이(Yayoi Kusama)의 블랙 & 골드 컬러 ‘호박(Pumpkin)’(2014)이 앞마당에, 린다 벵글리스(Lynda Benglis)의 캔디 컬러 분수 조각이 뒷마당에 전시돼 있고, 실내의 하얀 벽에는 웨민쥔의 자화상이, 류샤오둥의 대형 회화와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의 네온 설치 작품이 걸려 있다. 영국의 현대미술을 부활시킨 YBA(Young British Artist)의 대표 주자, 트레이시 에민의 팬이라면 작가의 바람으로 또 다른 호수 한쪽에 배치되었다는 거대 브론즈 조각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당신(All I Want is You)’(2016)도 먼 길을 마다하지 말고 꼭 찾아가 봐야 한다. 작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해에 완성한 이 자화상에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부재의 감각이 담겨 있다.

하우메 플렌자 ‘Sanna’ / © Anthony Laurino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왕과 왕비(King and Queen)’(1987)가 원색과 낙서 이미지로 유명한 작가의 다른 면을 일깨워준다면, 전투용 비행기를 동원해 전쟁의 참혹함을 상기시키는 안셀름 키퍼(Anselm Kiefer)의 ‘양귀비와 기억(Poppy and Memory)’(2017), 아름다움의 덧없는 순간을 어린 소녀의 얼굴에 담은 하우메 플렌자(Jaume Plensa)의 새하얀 파이버글라스 조각 ‘사나(Sanna)’(2015), 인도의 서민들이 매일 쓰는 주방용품으로 신성한 바니안나무를 이룬 수보드 굽타(Subodh Gupta)의 ‘민중의 나무(People Tree)’(2017) 등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동시대 작가들의 최신작은 이곳을 더욱 생동감 있는 예술의 현장으로 만든다.

특유의 유머가 조각에도 반영된 키스 헤링의 ‘King and Queen’ © Anthony Laurino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인도계 영국작가 수보드 굽타의 ‘People Tree’ / © Robert Berg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해마다 도넘의 환경을 반영한 장소 특정적 작품이 느는 것도 특징이다. 가장 최근 발표된 미국의 현대미술가 더그 에이큰(Doug Aitken)의 거대 설치미술 작품은 그 방향성에 방점을 찍는다고 할 수 있겠다. ‘소리의 산, 소노마(Sonic Mountain, Sonoma)’(2019)는 풍경(風磬)이 바람에 반응하듯, 소노마의 웅장한 자연환경에 반응해 매번 다른 음악을 들려준다. 이 작품의 발표 시기에 맞춰 도넘에서는 이제까지 내놓은 40여 가지 조각 컬렉션을 소개하는 묵직한 컬렉션 북도 출간했다.

바람에 반응해 소리를 만드는 작품 ‘Sonic Mountain (Sonoma)’ / Courtesy of The Donum Estate

“삶에서 좋은 것들은 많은 경우 우연을 통해서 옵니다.”
도넘의 주인인 앨런과 메이 워버그(Mei Warburg)가 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틀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시도하고 그렇게 감각과 사고가 확장될 때야말로 가장 고귀한 행복을 느끼지 않던가.
아트와 자연이 도넘의 주인 앨런의 인생에 가장 오래도록 지속될 행복을 가져다주었듯, 방문객도 이곳에서 그 소중한 감각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도넘에서는 소규모 예약제로 와인 테이스팅과 조각 공원 투어를 운영하고 있다.

주소 24500 Ramal Road, Sonoma, CA 95476
문의 +1-707-732-2200
홈페이지 thedonumestate.com
 

DONUM ESTATE

2020. 3 에디터:정재욱
글: 한예준
자료제공: 도넘 에스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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