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베르제 박물관 공식 페이스북
달걀의 가장 화려한 변신, 파베르제의 달걀
달걀 하나로 보석 세공의 끝을 보여준다. 부활절의 전통은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달걀로 부활했는가?
석기시대의 알공예
근대 이전의 인간에게 자연, 특히 하늘은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었다. 하늘이 내려주는 햇빛과 빗물은 때로는 풍요를, 때로는 가뭄과 홍수를 선사했다. 그래서 자연을 신격화한 고대 인류는 지역을 막론하고 대부분 하늘 또는 태양신을 최고 신으로 섬기곤 했다.
하늘과 땅 사이를 넘나드는 새들은 최고 신의 변신이나 자손으로 여겨졌다. 전설이나 설화에서 상당히 많은 영웅이 알에서 태어나곤 하는데, 이는 하늘/태양신과 연결시켜 혈통적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새들의 알은 상서로운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하늘과 땅 사이를 넘나드는 새들은 최고 신의 변신이나 자손으로 여겨졌다. 전설이나 설화에서 상당히 많은 영웅이 알에서 태어나곤 하는데, 이는 하늘/태양신과 연결시켜 혈통적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새들의 알은 상서로운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1916년 제작된 ‘세인트 조지의 이스터 에그(Order of St. George Easter Egg)’. 현재 파베르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Shutterstock
2010년, 프랑스 보르도대학의 피에르-장 텍시에 고고학과 교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6만5,000년에서 5만5,000년 전의 타조알을 발견했다. 말기 구석기 시대의 것인 이 타조알에는 인위적인 조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알 장식 유물이었다. 구석기인에겐 예술과 신앙의 경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다. 유려한 곡선이 전하는 안정감 때문일 수도 있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신비로움 때문일 수도 있다. 여하튼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새알에 장식을 해왔고, 지금으로부터 약 7,000년 전 닭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면서 달걀공예는 새알 장식의 대표 주자로 부상했다.
고대 유대인은 유월절이면 달걀을 삶았고, 페르시아제국에선 달걀에 색칠을 하며 새해를 축하했다. 유월절은 유대인이 이집트 파라오의 지배에서 벗어난 걸 축하하는 축제다. 이름 때문에 유월(六月)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유월절은 유대력 1월 14일에 열린다. 유월절의 한자는 ‘넘을 유(逾)’와 ‘건널 월(越)’이고, 시기적으론 우리의 3~4월에 해당한다. 유월절의 달걀은 구속에서 자유로, 겨울에서 봄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변화의 상징이다. 페르시아의 새해 달걀과 다를 바 없던 것이다.
고대 유대인은 유월절이면 달걀을 삶았고, 페르시아제국에선 달걀에 색칠을 하며 새해를 축하했다. 유월절은 유대인이 이집트 파라오의 지배에서 벗어난 걸 축하하는 축제다. 이름 때문에 유월(六月)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유월절은 유대력 1월 14일에 열린다. 유월절의 한자는 ‘넘을 유(逾)’와 ‘건널 월(越)’이고, 시기적으론 우리의 3~4월에 해당한다. 유월절의 달걀은 구속에서 자유로, 겨울에서 봄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변화의 상징이다. 페르시아의 새해 달걀과 다를 바 없던 것이다.

파베르제 박물관에 전시된 파베르제의 달걀을 관찰하는 아이 © Shutterstock
이스터 에그, 또는 달걀공예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분열된 로마제국을 통일한 후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 ‘모든 생명은 알에서부터(Omne vivum ex ovo)’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새알에 대한 로마인의 애정은 각별했다. 달걀은 새로운 생명을 상징했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달걀의 의미는 더 커졌다. 달걀이 단순한 탄생을 넘어 부활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부활절이면 로마제국의 기독교도들은 달걀 삶는 물에 양파 껍질을 아끼지 않고 집어넣었다. 양파 껍질이 뿜어내는 색소가 달걀을 빨갛게 익혔기 때문이다. 붉은색은 예수의 피와 희생을 의미했다. 여기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로마의 황제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로마 황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 달걀을 가리키며 말했다. “달걀 색깔도 빨갛게 바꾸지 못하는데 어찌 삶과 죽음을 바꿀 수 있단 말이냐.” 황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걀은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기독교 국가가 된 후 로마인들은 광장에 나와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며 서로의 붉은 달걀을 맞부딪혔다. 우리의 엿치기처럼 상대의 달걀 껍질을 깨는 소소한 축제 유희가 탄생한 것이다. 또 예쁘게 단장한 달걀을 여기저기 숨겨두고 아이들에게 찾도록 하는 놀이도 생겨났다. 기독교의 ‘이스터 에그’ 전통이 시작된 것이다.
기독교 국가가 된 후 로마인들은 광장에 나와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며 서로의 붉은 달걀을 맞부딪혔다. 우리의 엿치기처럼 상대의 달걀 껍질을 깨는 소소한 축제 유희가 탄생한 것이다. 또 예쁘게 단장한 달걀을 여기저기 숨겨두고 아이들에게 찾도록 하는 놀이도 생겨났다. 기독교의 ‘이스터 에그’ 전통이 시작된 것이다.

파베르제 박물관에 전시된 ‘르네상스 이스터 에그(Renaissance Easter Egg)’, 1894년 제작 © Shutterstock
한편 로마제국을 통합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터키에 새로운 해양 요새 도시를 건설했다. 그는 이 도시를 ‘콘스탄티누스의 새로운 로마’라고 부르고 옮겨갔다. 새로운 로마는 곧 콘스탄티노폴리스 또는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원래의 수도 로마에는 교황을 남겼다. 로마제국은 동서로 나뉘어,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견제하며 발전했다.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이 따로 서기를 한 것처럼 기독교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1054년, 동서교회는 성상 파괴 논쟁을 벌였다. 가톨릭이 된 서로마제국의 기독교와, 동방정교가 된 동로마제국의 기독교는 서로를 파문할 정도로 격렬히 다퉜다. 그래도 이들은 기독교라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선 손을 잡았다. 동로마제국은 중부유럽과 동유럽은 물론 러시아까지 동방정교 문명권으로 흡수했다. 하지만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제국의 강력한 화포에 무너진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 오스만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로 다시 태어났다. 이 무렵 북방에는 새로운 강국이 출현하고 있었다. 몽골에 예속되어 있던 모스크바 공국이 주변을 통합하며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던 것이다. 1469년,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는 동로마제국 마지막 황제의 조카와 결혼하며 자신이 동방정교의 적통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역사의 변두리에 머무르던 러시아가 세계 무대의 중심에 나서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1480년, 이반 3세는 모스크바 공국을 지배하던 킵차크한국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스스로를 ‘차르’라고도 불렀다. ‘카이사르’ 또는 ‘시저’의 슬라브식 발음인 차르 호칭 역시 로마제국의 계승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파베르제 박물관 © Shutterstock
그리스와 로마는 서구 문명의 토대다. 그래서 근대 나폴레옹이나 현대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은 힘만 생기면 로마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대개 그런 주장은 비웃음만 샀는데, 15~16세기의 러시아가 딱 그랬다. 유럽인에게 이제 막 몽골의 멍에를 벗은 러시아는 로마의 정통 상속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표트르대제의 개혁 이후 러시아는 변했다. 러시아는 유럽 전체를 장악한 나폴레옹을 격파하며 근대 반동 체제의 주역으로 거듭났다. 1853년에는 오스만제국과의 해전에서 승리하며 영국과 프랑스를 긴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미국이 서부를 개척하며 막대한 자원을 비축한 것처럼 러시아도 시베리아로 영토를 넓히며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기독교 문명, 유럽 문명의 중심으로 인정받으려면 군사력이나 경제력만으론 부족했다. 러시아는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자랑거리가 필요했다. 러시아 황실은 화려한 로모노소프 도자기와 모피를 만들었고, 전채와 메인 디시 그리고 디저트가 순서대로 서빙되는 음식 문화를 개발했다(풀코스 정찬은 프렌치가 아닌 러시안 스타일이다). 음악과 발레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정교 특유의 평면 성화인 이콘으로 장식한 대성당도 건축했다. 러시아는 더 화려하고, 더 경건하게 유럽의 중심에 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위에서 바라본 ‘15주년 이스터 에그(Fifteenth Anniversary Easter Egg)’ © 파베르제 박물관 공식 페이스북
파베르제의 달걀은 크기에 비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수집품이다. 새들의 알을 아름답게 장식하던 구석기 시대의 전통이 근현대에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살펴보면 흥미진진하다.
달걀공예로 유럽 문명의 중심을 향하다
러시아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부터 슬라브 특유의 달걀공예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많은 역사를 공유하는데, 우크라이나가 특히 뛰어난 달걀공예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 슬라브족은 원시적 정령신앙을 숭배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슬라브인들은 달걀에 왁스로 바람, 비, 태양, 동물, 기하학적 무늬 등을 그린 다음 색을 칠했다. 왁스가 묻은 곳은 물감이 들지 않기 때문에 달걀에는 매우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졌다. 슬라브인들은 ‘피산키’라고 부르는 이 달걀을 땅에 묻으며 풍요와 액땜을 기원했다. 이런 전통이 있었기에 러시아와 슬라브 문화권에선 부활절 달걀공예를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달걀공예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보석 세공으로 이어지게 된다.
1885년, 차르인 알렉산더 3세는 아내인 마리아 표도로브나에게 부활절 달걀을 선물했다. ‘암탉 달걀’이라고 이름 붙은 이 제품은 금으로 만든 것이다. 하얀 에나멜로 칠해 진짜 달걀처럼 보이지만 반을 쪼개어 열면 내부는 금빛으로 번쩍인다. 갈라진 달걀 안에선 황금 노른자를 뺄 수 있다. 노른자를 열면 이번에는 황금 암탉이 나온다. 다시 암탉 안에는 차르 왕관의 미니어처가, 미니어처 안에는 붉은 루비로 만든 초소형 달걀이 숨어 있었다(현재 왕관과 루비는 유실된 상태다). 화려함의 극치였다. 결혼 20주년을 맞이한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감격했고, 차르는 보석세공사에게 매년 새로운 달걀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1885년, 차르인 알렉산더 3세는 아내인 마리아 표도로브나에게 부활절 달걀을 선물했다. ‘암탉 달걀’이라고 이름 붙은 이 제품은 금으로 만든 것이다. 하얀 에나멜로 칠해 진짜 달걀처럼 보이지만 반을 쪼개어 열면 내부는 금빛으로 번쩍인다. 갈라진 달걀 안에선 황금 노른자를 뺄 수 있다. 노른자를 열면 이번에는 황금 암탉이 나온다. 다시 암탉 안에는 차르 왕관의 미니어처가, 미니어처 안에는 붉은 루비로 만든 초소형 달걀이 숨어 있었다(현재 왕관과 루비는 유실된 상태다). 화려함의 극치였다. 결혼 20주년을 맞이한 마리아 표도로브나는 감격했고, 차르는 보석세공사에게 매년 새로운 달걀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켈치 헨 이스터 에그(Kelch Hen Easter Egg)’, 1898년 제작 © 파베르제 박물관 공식 페이스북

‘15주년 이스터 에그(Fifteenth Anniversary Easter Egg)’, 1911년 제작 © 파베르제 박물관 공식 페이스북
보석세공사의 이름은 페테르 카를 파베르제.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을 피해 러시아령 에스토니아로 넘어온 이주민의 후예였다. 그는 러시아제국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보석회사 파베르제 공방을 설립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금세공사가 되었다. 1882년, 페테르 카를 파베르제의 보석 세공은 모스크바 보석 전시회에서 황실 훈장을 수여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파베르제의 달걀에 만족한 차르가 ‘러시아 황실 인증서’를 내리면서, 파베르제 공방은 러시아 최고의 보석 브랜드가 되었다. 지금도 파베르제는 프랑스의 카르티에, 이탈리아의 불가리, 미국의 티파니(2019년 유럽에 매각됨)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1885년부터 파베르제 공방은 매년 부활절 달걀을 하나씩 세상에 내놓았다. 1887년부터는 달걀의 기획을 황실에 보고할 필요도 없어졌다. 믿을 만하니 알아서 최고의 달걀을 만들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1894년, 알렉산더 3세가 사망하고 그의 장남인 니콜라이 2세가 새로운 차르로 즉위했다. 니콜라이 2세도 파베르제의 달걀을 원했다. 아니, 그는 아버지의 두 배를 원했다. 어머니와 함께 아내에게 바칠 달걀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달걀은 점점 더 정교해졌다. 심지어 달걀 안에 기계 장치까지 설치했다. 1900년 작품인 ‘수탉 달걀’에선 매시 정각만 되면 달걀이 열리면서 수탉이 튀어나와 노래를 부를 정도였다.
1885년부터 파베르제 공방은 매년 부활절 달걀을 하나씩 세상에 내놓았다. 1887년부터는 달걀의 기획을 황실에 보고할 필요도 없어졌다. 믿을 만하니 알아서 최고의 달걀을 만들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1894년, 알렉산더 3세가 사망하고 그의 장남인 니콜라이 2세가 새로운 차르로 즉위했다. 니콜라이 2세도 파베르제의 달걀을 원했다. 아니, 그는 아버지의 두 배를 원했다. 어머니와 함께 아내에게 바칠 달걀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달걀은 점점 더 정교해졌다. 심지어 달걀 안에 기계 장치까지 설치했다. 1900년 작품인 ‘수탉 달걀’에선 매시 정각만 되면 달걀이 열리면서 수탉이 튀어나와 노래를 부를 정도였다.

파베르제의 달걀들 © 파베르제 박물관 공식 페이스북
달걀의 가격은 250억 원
유럽의 왕실과 귀족, 부호들은 부활절이 다가오면 어떤 모습의 파베르제 달걀이 나올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파베르제 공방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1900년에 개최된 파리엑스포에서 파베르제는 심사위원을 맡았다. 파베르제 공방의 작품들은 심사 없이 전시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파베르제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1917년 혁명이 일어나면서 로마노프 황가는 몰락했다. 차르 가족은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예카테린부르크의 임시 거처 지하실에서 기습 처형되었다. 파베르제 공방의 모든 자산에도 국유화 명령이 떨어졌다. 파베르제 가족은 라트비아로 탈출하지만 발트 3국도 혁명을 피하진 못했다. 이들은 1920년 6월 스위스의 한 호텔에 안착하지만 크게 충격을 받은 페테르 카를 파베르제는 같은 해 9월에 숨을 거뒀다.

파베르제 박물관 © Shutterstock
파베르제의 달걀은 1885년부터 1894년까지 10개가 만들어졌다. 1895년부터 1916년까진 그 수가 매년 2개씩으로 늘었지만, 러일전쟁이 벌어진 1904년과 1905년에는 생산되지 않았으므로 총 40개가 완성되었다. 미완성 작품 7점을 제외하면 파베르제의 달걀은 총 50점이다. 이 가운데 10점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베르제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3점은 영국 여왕의 손에 들어갔다. 출판 명문인 포브스 가문은 경매를 통해 달걀 9개를 매입했는데, 경영 악화로 달걀 일부 또는 전체를 러시아 석유 재벌에 매각했다는 소문이 있다. 2014년에는 미국 중서부의 벼룩시장에서 파베르제의 달걀 하나가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존재가 확인된 달걀은 43개고, 이들의 평균 가격은 25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워낙 고가인 탓에 파베르제의 달걀은 영화에도 종종 등장한다. 영화 <오션스 트웰브>에서 조지 클루니와 뱅상 카셀은 최고의 도둑 자리를 놓고 대결하는데, 파베르제의 달걀을 훔치는 쪽이 승리하는 내기였다.
파베르제의 달걀은 크기에 비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수집품이다. 새들의 알을 상서롭게 받아들여 아름답게 장식하던 구석기 시대의 전통이 근현대에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살펴보면 흥미진진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가장 고귀한, 가장 화려한, 가장 비싼 달걀을 품은 도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박물관 투어를 하면서 파베르제의 달걀을 빼먹는 건 어쩌면 서구 기독교 예술의 노른자 하나를 놓치는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세상의 어느 도시에서 행방이 묘연해진 달걀 7개 가운데 하나를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파베르제의 달걀은 크기에 비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수집품이다. 새들의 알을 상서롭게 받아들여 아름답게 장식하던 구석기 시대의 전통이 근현대에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살펴보면 흥미진진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가장 고귀한, 가장 화려한, 가장 비싼 달걀을 품은 도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박물관 투어를 하면서 파베르제의 달걀을 빼먹는 건 어쩌면 서구 기독교 예술의 노른자 하나를 놓치는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세상의 어느 도시에서 행방이 묘연해진 달걀 7개 가운데 하나를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파베르제 박물관 © Shutterstock

‘계곡의 백합 이스터 에그(Lilies-of-the-Valley Easter Egg)’, 1898년 제작 © Shutterstock

파베르제 박물관에 전시된 파베르제 공방의 장신구들 © Shutterstock
달걀을 만날 확실한 장소, 파베르제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파베르제 박물관이 있다. 이름에서 짐작하듯,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비싼 달걀을 만날 수 있는 확실한 장소 중 한 곳이다. 파베르제 박물관은 회화, 도자기, 조각 등을 포함해 4,000점이 넘는 장식 및 미술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데, 박물관 컬렉션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로마노프 황가를 위해 만든 파베르제의 달걀이다. 총 9점의 파베르제 달걀이 파베르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파베르제 달걀의 진품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다.
한편 파베르제 공방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보석 공방 중 하나다. 파베르제 박물관에서는 파베르제의 달걀뿐 아니라 공방에서 만든 귀금속과 장신구 등 파베르제 공방의 아름다운 유산을 만날 수 있다. 파베르제 박물관의 건물 또한 볼거리다. 18세기 후반에 지은 궁전을 7년여의 복원 작업을 거쳐 2013년 박물관으로 개관한 것으로, 확실한 고증을 거쳐 복원해놓은 건물의 내부와 외부는 박물관의 컬렉션만큼이나 아름답다.
파베르제 박물관을 간다면 기프트 숍을 놓치지 말자. 이곳에서 파베르제의 달걀을 구매할 수 있다. 물론 진품이 아니라 가격은 훨씬 더 저렴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하는 대부분의 파베르제의 달걀 모조품보다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다.
주소 21, Fontanka river embankment, St Petersburg, Russia
문의 +7-812-333-26-55
홈페이지 fabergemuseum.ru
한편 파베르제 공방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보석 공방 중 하나다. 파베르제 박물관에서는 파베르제의 달걀뿐 아니라 공방에서 만든 귀금속과 장신구 등 파베르제 공방의 아름다운 유산을 만날 수 있다. 파베르제 박물관의 건물 또한 볼거리다. 18세기 후반에 지은 궁전을 7년여의 복원 작업을 거쳐 2013년 박물관으로 개관한 것으로, 확실한 고증을 거쳐 복원해놓은 건물의 내부와 외부는 박물관의 컬렉션만큼이나 아름답다.
파베르제 박물관을 간다면 기프트 숍을 놓치지 말자. 이곳에서 파베르제의 달걀을 구매할 수 있다. 물론 진품이 아니라 가격은 훨씬 더 저렴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하는 대부분의 파베르제의 달걀 모조품보다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다.
주소 21, Fontanka river embankment, St Petersburg, Russia
문의 +7-812-333-2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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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머물 곳: 롯데호텔 상트페테르부르크
롯데호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관광 명소인 성 이삭 광장 바로 맞은편에 자리한다. 인근에 넵스키 프로스펙트 주요 거리와 예르미타시미술관, 마린스키 극장도 있어 비즈니스와 관광 모두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위치다. 호텔 건물은 19세기에 지은 역사 깊은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고풍스러운 외관의 건물 내부에 최신 시설을 갖춘 객실 150실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여름 상트페테르브루크의 백야를 감상하기 좋은 6층의 오픈 바 ‘엘 테라사(L Terrasa)를 포함, 다양한 레스토랑과 바를 즐길 수 있다.
주소 2, Antonenko Lane, Saint-petersburg, Russia
문의 +7-812-336-10-00
홈페이지 www.lottehotel.com/stpetersburg-ho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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