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ew York, New York, 1981, Acrylic, oil stick, spray paint, silver spray paint, and paper collage on canvas, 128.3×226.1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왕족(특권), 영웅주의 그리고 거리입니다.”
첫 문장부터 경매가를 들먹이니 속물로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미술 분야에서 작품 가격은 작가를 규정하는 숙명이자 포장지니까.
그런 점에서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란 이름은 그 자체로 최고의 상징이자 브랜드다. 그는 가장 비싼 그림을 파는 작가이고, 그의 전시는 여전히 많은 관람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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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키아는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그를 미술관에 데리고 다니며 예술에 대한 경험을 탄탄하게 쌓도록 교육했다. 바스키아에게 어머니와 그림은 강한 연결 고리였다. 어머니와 함께 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처음 보고 화가를 결심했을 때도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Old Cars, 1981, Acrylic, oil stick, and paper collage on canvas, 121.9×120.3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Untitled (Bracco di Ferro), 1983, Acrylic and oil stick on canvas mounted on wood supports, 182.9×182.9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어려서부터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던 바스키아는 이를 이용해 더 저명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에겐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나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 같은 유명인이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알 디아즈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유명세 때문에 작업에 제약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익명성을 보장받고 싶었다. 결국 세이모는 해체했다. “세이모는 죽었다(SAMO is Dead)”라는 유명한 낙서가 당시 뉴욕 곳곳에 새겨진 이유도 그래서다.
이후 바스키아는 자퇴를 한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그가 굳이 거리로 나앉아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거리에서 노숙을 한다.

뉴욕 브루클린 거리에 그려진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의 벽화 © shutterstock
동시에 두 사람을 둘러싼 여러 소문도 함께 입방아에 오르며 바스키아를 괴롭힌다. 1985년에 바스키아와 워홀이 함께 기획한 전시가 미술계의 혹평과 함께 처참히 실패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는 커다란 금이 간다.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 없이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성찰로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대형 전시도 개최한다. 그러던 중 워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이로 인해 약물중독에 빠진 바스키아는 워홀의 사망 1년 후인 1988년 8월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만다. 코트디부아르의 최대 도시 아비장으로 이주하기 엿새 전이었다. 그가 그토록 동경하던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나이인 만 27세였다.

Untitled (Yellow Tar and Feathers), 1982, Acrylic, oil stick, crayon, paper collage, and feathers on joined wood panels, 245.1×229.2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Victor 25448, 1987, Acrylic, oil stick, wax, and crayon on paper laid on canvas, 182.9×332.7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8세가 되던 해, 바스키아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한다. 어머니는 그에게 <그레이의 해부학(Gray’s Anatomy)>이란 책을 선물한다. 인체의 장기와 뼈 그림이 가득하던 해부학 교과서다. 이 책에 매료된 바스키아는 자신의 작품에 해골과 인체 구조, 다양한 기호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또 인종과 계급 간 불평등이 만연하던 미국 사회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성공한 유색인종을 캐릭터로 만들고 머리 위에는 존경과 권위의 의미를 담아 왕관도 함께 그려넣었다. 그런 해골과 왕관이 가득한 바스키아의 작품들을 서울에서 만나게 되었다.

바스키아 전시장 전경 ©롯데뮤지엄

바스키아 전시장 전경 ©롯데뮤지엄
전시는 바스키아 개인과 작품을 대변할 수 있는 세 가지 키워드 ‘거리’, ‘영웅’, ‘예술’로 구성했다. 뉴욕 거리에서 시작한 SAMO 시기부터 작가의 예술 세계에 드러나는 대중문화와 산업화의 방식, 영웅을 모티브로 작가가 창조한 다양한 아이콘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식과 시선으로 작업한 회화, 조각, 드로잉, 세라믹 작품 등이 전시된다. 인생 파트너인 앤디 워홀과 함께 작업한 대형 작품도 볼 수 있다.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바스키아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흐름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그의 작품은 미술과 음악, 패션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확대 재생산되며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비록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바스키아는 여전히 신화이자 거리의 영웅으로 살아가고 있다.
<JEAN-MICHEL BASQUIAT-ROYALTY, HEROISM, AND THE STREE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