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극으로 해석한 그리스 비극 <트로이의 여인들>
우리 창극이 그리스의 비극을 포섭했다. 앞으로 창극이 얼마나 더 확대되고 얼마나 더 세련되게 변할지 기대된다.
언젠가부터 국악이 달라지고 있다. ‘국악소녀’가 인기몰이에 나서더니, 홍대의 젊은이들이 황해도 굿을 펑크록으로 풀어낸 ‘악단광칠’에 열광한다. 10년 차 국악 밴드 ‘고래야’는 BBC 라디오 진행자들의 추천을 받으며 온라인 공연을 벌였고, ‘씽씽밴드’는 NPR(미국 라디오 공영방송)의 초청을 받아 경기민요 기반의 록 음악을 열창했다. 판소리를 대중음악으로 해석한 ‘이날치 밴드’의 뮤직비디오는 유튜브에서 수억 뷰를 기록하며 전 세계 화제의 중심에 섰다.
공연 문화에서도 현대화한 전통 창극이 ‘힙하게’ 떠오르는 중이다. 다가오는 12월 3일부터 국립극장에선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을 공연한다. 언젠가부터 국악이 친숙한 예술 장르가 되어 우리 주변에 다가오고 있다.
공연 문화에서도 현대화한 전통 창극이 ‘힙하게’ 떠오르는 중이다. 다가오는 12월 3일부터 국립극장에선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을 공연한다. 언젠가부터 국악이 친숙한 예술 장르가 되어 우리 주변에 다가오고 있다.


옛것을 그대로 고수한다고 아름다운 전통이 되진 않는다. 전통이란 과거의 것이어선 안 된다. 현재와 어우러져야 한다. 오늘의 시각으로 끊임없이 재해석해야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창극으로 간 판소리
창극은 판소리에 뿌리를 둔 우리의 근대 공연 예술이다. 판소리는 노래하는 사람(창자)과 북을 치는 고수 둘이 이야기를 전개한다. 공연 문화가 발전하지 않은 17~18세기에는 판소리만으로도 행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청나라 사람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우리나라 사회와 문화에 큰 변화가 발생했다.
당시 우리 김치에 가장 인기 있는 재료는 배추가 아니라 무였다. 배추김치가 김치의 왕이 된 건 청나라에서 호배추를 수입하면서부터다. 또 돼지기름을 들어오면서 빈대떡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국악도 그 시기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게 된다. 중국 경극이 소개되면서 판소리에도 공연의 연극성을 가리키는 ‘너름새’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고수의 장단에 맞추어 창자 혼자 노래하던 기존 판소리에서 벗어나 대화 형식의 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인원이 늘어나고 연극성이 강화되면서 1900년대 들어 자연스럽게 창극이 태어났다.
하지만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다. 국권을 잃은 나라에서 전통문화를 고수하고 발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본에서 넘어온 신파극에 밀려 계속 쇠락했다. 해방 이후 ‘국극’이란 새 이름을 달고 잠깐 살아나는가 싶었지만 곧 전쟁이 터지면서 다시 활기를 잃었다.
다행히 1960년대 들어 부활의 길이 열렸다. 1962년, 국립극장에서 부설 공연단으로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오페라단을 창단한 것이다. 이후 창극은 장충동에 신설된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꾸준히 발전해왔다. 국립창극단은 전통적 스타일의 판소리 다섯 바탕(‘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을 50년 넘게 공연하며 전통 창극 애호층을 형성했다. 그리고 2012년부터는 레퍼토리 시즌을 도입해 전통의 혁신에도 나섰다.
당시 우리 김치에 가장 인기 있는 재료는 배추가 아니라 무였다. 배추김치가 김치의 왕이 된 건 청나라에서 호배추를 수입하면서부터다. 또 돼지기름을 들어오면서 빈대떡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국악도 그 시기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게 된다. 중국 경극이 소개되면서 판소리에도 공연의 연극성을 가리키는 ‘너름새’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고수의 장단에 맞추어 창자 혼자 노래하던 기존 판소리에서 벗어나 대화 형식의 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인원이 늘어나고 연극성이 강화되면서 1900년대 들어 자연스럽게 창극이 태어났다.
하지만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다. 국권을 잃은 나라에서 전통문화를 고수하고 발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본에서 넘어온 신파극에 밀려 계속 쇠락했다. 해방 이후 ‘국극’이란 새 이름을 달고 잠깐 살아나는가 싶었지만 곧 전쟁이 터지면서 다시 활기를 잃었다.
다행히 1960년대 들어 부활의 길이 열렸다. 1962년, 국립극장에서 부설 공연단으로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오페라단을 창단한 것이다. 이후 창극은 장충동에 신설된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꾸준히 발전해왔다. 국립창극단은 전통적 스타일의 판소리 다섯 바탕(‘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을 50년 넘게 공연하며 전통 창극 애호층을 형성했다. 그리고 2012년부터는 레퍼토리 시즌을 도입해 전통의 혁신에도 나섰다.


창극의 무한 변신에 도전하다
국립극장의 레퍼토리 시즌 제도가 도입되면서 국립창극단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해외 유명 연출가까지 초빙해 창극의 지휘권을 넘기기도 한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려는 의도였다. 시즌제 도입 직전인 2011년,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수제자이자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오페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Achim Freyer)에게 <수궁가>의 연출을 맡겼다.
2011년 9월에 초연한 <수궁가>는 <별주부전>이나 <토끼전> 등의 이름을 달고 공연되던 기존 작품과 전혀 달랐다. 토끼는 출세욕이 가득하고, 거북이(별주부)는 돈독이 올라 상금을 노린다. 무대는 육지와 바다를 넘나들지만 어느 쪽이건 첨단 기술에 대한 욕심으로 병든 공간이다. 아힘 프라이어와 함께한 <수궁가>는 결국 전 지구적 환경문제를 건드린다. 토끼와 거북이의 캐릭터가 바뀌었다. 주제도 변화했다. 브레히트의 제자가 연출한 작품답게 절제된 무대장치도 새로웠다. 관객은 갈채를 보냈고, 국립창극단은 흥미진진한 도전을 이어갔다.
2014년에는 그리스 비극 <메디아>도 창극으로 무대에 오른다. 이후 도화살의 주인공 옹녀를 지고지순한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바꿔준 <변강쇠 점 찍고 옹녀>(2019년), 안드레이 서반이 연출한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2014년), 재일교포 감독이자 연출가인 정의신이 브레히트의 대표작을 재해석한 <코카서스의 백묵원>(2017년),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주군인 단종에게 사약을 들고 가야 하는 의금부도사 이야기로 최근 다시 무대에 오른 <아비. 방연>에 이르기까지. 국립창극단은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희극과 비극을 넘나드는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전통적인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2011년 9월에 초연한 <수궁가>는 <별주부전>이나 <토끼전> 등의 이름을 달고 공연되던 기존 작품과 전혀 달랐다. 토끼는 출세욕이 가득하고, 거북이(별주부)는 돈독이 올라 상금을 노린다. 무대는 육지와 바다를 넘나들지만 어느 쪽이건 첨단 기술에 대한 욕심으로 병든 공간이다. 아힘 프라이어와 함께한 <수궁가>는 결국 전 지구적 환경문제를 건드린다. 토끼와 거북이의 캐릭터가 바뀌었다. 주제도 변화했다. 브레히트의 제자가 연출한 작품답게 절제된 무대장치도 새로웠다. 관객은 갈채를 보냈고, 국립창극단은 흥미진진한 도전을 이어갔다.
2014년에는 그리스 비극 <메디아>도 창극으로 무대에 오른다. 이후 도화살의 주인공 옹녀를 지고지순한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바꿔준 <변강쇠 점 찍고 옹녀>(2019년), 안드레이 서반이 연출한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2014년), 재일교포 감독이자 연출가인 정의신이 브레히트의 대표작을 재해석한 <코카서스의 백묵원>(2017년),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주군인 단종에게 사약을 들고 가야 하는 의금부도사 이야기로 최근 다시 무대에 오른 <아비. 방연>에 이르기까지. 국립창극단은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희극과 비극을 넘나드는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전통적인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여인의 한, 창극이 되다
신종 바이러스 감염증인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모든 공연 예술이 정지되다시피 했다. 다행히 그 기세가 한층 수그러들면서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트로이의 여인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트로이의 여인들>의 원작은 그리스의 희곡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이다. 에우리피데스는 국립창극단이 2013년에 상연한 <메디아>의 작가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뼈대는 트로이 왕국과 그리스 연합군이 사활을 걸고 10년간 전쟁을 벌였다는 유명한 신화다. 그리스 연합군의 퇴각 후, 트로이 사람들은 텅 빈 그리스군 진영에 남은 목마를 전리품으로 끌고 성에 들어온다. 밤이 되자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은 트로이를 불바다로 만든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그 이후를 다룬 작품이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의 무대에는 몇 명의 여인이 상주한다. 트로이의 멸망으로 전리품이 되어 뿔뿔이 흩어질 처지에 놓인 왕가 여인들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인 헤큐바, 예언 능력을 지녔지만 신에게 설득력을 빼앗긴 공주 카산드라, 아버지와 일곱 오빠 그리고 트로이 최고의 용사인 남편 헥토르를 모두 아킬레스의 칼 아래 잃은 안드로마케, 스파르타의 왕비였지만 신의 장난으로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도주해 전쟁과 파멸의 단초를 제공한 헬레나가 그들이다.
여자의 얼굴을 하지도 않은 남자들의 전쟁 때문에 모든 것을 잃게 된 이들은 자신들의 분노와 좌절을 털어놓는다. 싱가포르의 연출가 옹켕센은 그 절규를 극도의 미니멀리즘으로 풀어냈다. 무대장치라곤 하얀 구조물 하나가 전부다. 그 안에 영상을 투사하긴 하지만 돌이나 불 등의 동영상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의 무대에는 몇 명의 여인이 상주한다. 트로이의 멸망으로 전리품이 되어 뿔뿔이 흩어질 처지에 놓인 왕가 여인들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인 헤큐바, 예언 능력을 지녔지만 신에게 설득력을 빼앗긴 공주 카산드라, 아버지와 일곱 오빠 그리고 트로이 최고의 용사인 남편 헥토르를 모두 아킬레스의 칼 아래 잃은 안드로마케, 스파르타의 왕비였지만 신의 장난으로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도주해 전쟁과 파멸의 단초를 제공한 헬레나가 그들이다.
여자의 얼굴을 하지도 않은 남자들의 전쟁 때문에 모든 것을 잃게 된 이들은 자신들의 분노와 좌절을 털어놓는다. 싱가포르의 연출가 옹켕센은 그 절규를 극도의 미니멀리즘으로 풀어냈다. 무대장치라곤 하얀 구조물 하나가 전부다. 그 안에 영상을 투사하긴 하지만 돌이나 불 등의 동영상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옹켕센은 불필요한 수식을 덕지덕지 붙이기보단 창극의 소리 자체에 집중하려 한 듯하다. 소복에 맨발 차림의 여인들은 자신들이 전담하는 악기와 호흡을 맞춘다. 헤큐바는 거문고, 카산드라는 대금, 안드로마케는 아쟁과 해금, 헬레나는 피아노와 짝을 이룬다. 작품의 소리는 국악계 거장 안숙선 명창이 짰다. 2007년 <열하일기만보>로 대산문학상과 동아연극상 희곡상을 수상한 배삼식이 극본을 다듬었고, <기생충>의 음악을 책임진 정재일이 음악감독을 맡았다.
2016년 11월 국내에서 초연한 <트로이의 여인들>은 좌석 점유율 90% 이상을 기록하며 호평받았고, 이듬해 싱가포르 연극제에 초청되어 기립 박수를 받았다.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에서 공연을 이어가며 뜨거운 갈채를 받고 있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군더더기 장식을 덜어낸 작품이다. 작은 소품 하나, 미세한 움직임 하나에도 의미가 담겨 있다. 인터미션 없는 110분의 공연이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다. 창극은 다른 오페라에 비해 관람료도 저렴하게 책정되어 있다. 부담 없이 창극의 완전히 새로운 매력에 다가가보면 좋을 것이다. 창극이 마음에 든다면 좀 더 예스러운 공연도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다. 국립창극단의 새로운 도전이 반드시 현대적이거나 서구적인 콘텐츠와의 결합만 의미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국립창극단은 사라진 판소리 일곱 바탕의 이야기를 되살리는 ‘판소리 일곱 바탕 복원 시리즈’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고, 창극의 토대가 되는 판소리 보존에도 힘을 쏟고 있다. 30년 넘게 공연 중인 전국 명창들의 <완창판소리>에 도전하는 것도 추천한다. 언제나 첫 도전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시간과 관심을 기울이면 결과는 달콤할 것이다. 국립창극단의 도전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2016년 11월 국내에서 초연한 <트로이의 여인들>은 좌석 점유율 90% 이상을 기록하며 호평받았고, 이듬해 싱가포르 연극제에 초청되어 기립 박수를 받았다.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에서 공연을 이어가며 뜨거운 갈채를 받고 있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군더더기 장식을 덜어낸 작품이다. 작은 소품 하나, 미세한 움직임 하나에도 의미가 담겨 있다. 인터미션 없는 110분의 공연이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다. 창극은 다른 오페라에 비해 관람료도 저렴하게 책정되어 있다. 부담 없이 창극의 완전히 새로운 매력에 다가가보면 좋을 것이다. 창극이 마음에 든다면 좀 더 예스러운 공연도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다. 국립창극단의 새로운 도전이 반드시 현대적이거나 서구적인 콘텐츠와의 결합만 의미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국립창극단은 사라진 판소리 일곱 바탕의 이야기를 되살리는 ‘판소리 일곱 바탕 복원 시리즈’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고, 창극의 토대가 되는 판소리 보존에도 힘을 쏟고 있다. 30년 넘게 공연 중인 전국 명창들의 <완창판소리>에 도전하는 것도 추천한다. 언제나 첫 도전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시간과 관심을 기울이면 결과는 달콤할 것이다. 국립창극단의 도전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배삼식, 극본

옹켕센, 연출

정재일, 음악감독
트로이의 여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