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춘모 장인의 아름다운 갓
역사 속 박제된 유물처럼 보이던 갓이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을 통해 ‘한국 모자(Korean Hat)’로 불리며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갓을 전문으로 만드는 장인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국가무형문화재 제4호 정춘모 갓일장의 존재가 더욱 귀한 순간이다.
조선 시대에도 멋쟁이 사내들은 넘쳐났다. 사대부 양반은 물론이고 중인도, 먹고살기 힘든 평민도 그들 나름의 멋을 부렸다. 조선 후기, 혜원 신윤복이 그린 ‘휴기답풍(携妓踏楓)’에는 가마를 타고 가는 기생과 이를 옆에서 보는 젊은 양반이 등장한다. 잔뜩 부는 바람에 도포 자락과 턱 밑으로 길게 늘어진 갓끈이 심하게 휘날린다. 갓이 날아가지 않도록 양태(갓의 챙)를 슬쩍 붙잡고 있는 젊은 양반의 모습이 요즘 트렌드세터처럼 멋스럽다.

2020년 예올이 뽑은 ‘올해의 장인’ 전시에 선보인 갓과 대우
조선 멋쟁이의 핵심은 갓
문화재청에 올라온 자료를 보면 조선 시대 여성의 경우 저고리와 치마의 색상과 개성으로 저마다 멋을 낸 데 비해, 남성은 저고리 위에 덧입는 큰 옷, 우리가 흔히 두루마기라 부르는 포(袍)로 유행을 만들어갔다. 거기에 약간의 장신구로 포인트를 주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갓이다.
고려 공민왕 때 관모로 제정하면서 쓰이기 시작한 갓은 조선에서는 신분과 관직뿐 아니라 유교 문화의 선비 정신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 되었다. 동시에 멋의 표상이기도 했다. 갓의 둥근 테, 즉 양태의 둘레나 머리를 넣는 부분인 대우의 높이는 시대 유행에 따라 달라졌다. 17세기 중반부터는 양태가 너무 넓어 문을 드나드는 것조차 쉽지 않고, 방에 두 명이 마주봐야 앉을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또 양반은 갓끈에 산호나 호박 등 다양한 보석으로 구슬을 달아 멋을 냈다. 하지만 후기로 가면서 이런 사치를 우려한 조정은 과도한 멋내기를 금지한다.
고려 공민왕 때 관모로 제정하면서 쓰이기 시작한 갓은 조선에서는 신분과 관직뿐 아니라 유교 문화의 선비 정신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 되었다. 동시에 멋의 표상이기도 했다. 갓의 둥근 테, 즉 양태의 둘레나 머리를 넣는 부분인 대우의 높이는 시대 유행에 따라 달라졌다. 17세기 중반부터는 양태가 너무 넓어 문을 드나드는 것조차 쉽지 않고, 방에 두 명이 마주봐야 앉을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또 양반은 갓끈에 산호나 호박 등 다양한 보석으로 구슬을 달아 멋을 냈다. 하지만 후기로 가면서 이런 사치를 우려한 조정은 과도한 멋내기를 금지한다.

불에 달군 인두로 갓의 은은한 곡선 형태를 잡아주는 트집 잡기

다듬은 죽사(대나무실)로 섬세하게 엮는 과정을 반복하는 양태 직조
복잡하고 어려운 갓 만들기
말총과 대나무로 만든 갓은 재료, 색, 용도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검고 넓은 테에 높은 총모자를 올린 갓의 정확한 명칭은 흑립(黑笠)이다. 크기나 총모의 높이에 따라 조금씩 디자인은 변화되었지만, 보통 흑립을 갓으로 불렀다.
갓을 만드는 과정은 ‘갓일’이라고 한다. 작업 과정이 복잡한 데다 단계마다 재료를 다루는 기술이 달라 갓 제작은 오랫동안 분업 형태로 이루어졌다. 말총이나 대나무로 머리를 씌우는 원통형 틀인 대우를 만드는 ‘총모자일’, 대나무의 결을 쪼개 아주 가는 죽사를 만들어 한 올 한 올 엮어 둥근 테를 짜는 ‘양태일’, 대우와 양태를 결합해 명주를 붙여 먹칠하고 옻칠해 완성하는 ‘입자일’을 거쳐야 비로소 온전한 갓이 된다. 가장 까다롭고 과정이 긴 것은 양태일이다. 총 51개 과정 중 양태일에서만 24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갓을 만드는 과정은 ‘갓일’이라고 한다. 작업 과정이 복잡한 데다 단계마다 재료를 다루는 기술이 달라 갓 제작은 오랫동안 분업 형태로 이루어졌다. 말총이나 대나무로 머리를 씌우는 원통형 틀인 대우를 만드는 ‘총모자일’, 대나무의 결을 쪼개 아주 가는 죽사를 만들어 한 올 한 올 엮어 둥근 테를 짜는 ‘양태일’, 대우와 양태를 결합해 명주를 붙여 먹칠하고 옻칠해 완성하는 ‘입자일’을 거쳐야 비로소 온전한 갓이 된다. 가장 까다롭고 과정이 긴 것은 양태일이다. 총 51개 과정 중 양태일에서만 24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한국은 모자의 왕국이다. 세계 어디서도 이렇게 다양한 모자를 지니고 있는 나라를 본 적이 없다. 공기와 빛이 알맞게 통하고 여러 용도에 따라 제작되는 한국의 모자 패션은 파리 사람들이 꼭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갓일장과 올해의 장인
한국 공예 산업을 후원하는 재단법인 예올에서 2020년을 마무리하며 ‘올해의 장인’에 정춘모 장인을 선정했다.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장이다. 통영갓의 전 공정을 전수한 유일한 기능 보유자다. 정춘모 장인은 대우와 양태를 맞춰 마무리하는 입자장인 동시에 세 가지 과정을 모두 할 수 있다. 그는 처음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에서 명문으로 인정받는 통영갓의 전통을 이어갔다. 통영에서 서울로 와 여러 전통 공예 장인과 함께 터를 잡고 작업을 이어갔다. 선정릉에 있는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이 그곳이다.
그렇게 60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아내인 도국희 이수자가 옆에서 갓일을 도왔다. 갓을 만들려면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도국희 이수자는 갓일에서 가장 까다롭고 오래 걸리는 양태일을 맡아 작업한다. 두 부부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대나무를 0.1~0.3mm 두께로 잘게 쪼개 죽사를 만드는 도국희 이수자의 손이 바쁘면서도 섬세하다.
그렇게 60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아내인 도국희 이수자가 옆에서 갓일을 도왔다. 갓을 만들려면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도국희 이수자는 갓일에서 가장 까다롭고 오래 걸리는 양태일을 맡아 작업한다. 두 부부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대나무를 0.1~0.3mm 두께로 잘게 쪼개 죽사를 만드는 도국희 이수자의 손이 바쁘면서도 섬세하다.

Q. 처음 갓일을 배울 당시가 궁금합니다.
A. 내가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는데, 대구에서 갓일을 처음 시작했어요. 그러다 통영에서 온 장인 선생들을 따라 갓일을 배웠죠. 나중에 통영에 내려가서 세 분에게 배웠는데, 하는 일이 모두 달랐어요. 나는 총모자장, 양태장, 입자장 이렇게 세 가지 과정을 모두 배웠지요.
Q. 힘드실 텐데 왜 다 배우겠다고 하셨어요?
A. 배우려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이분들이 70대였는데, 주변 사람이나 자식들이나, 통영 사람 아무도 배우려고 하지 않았어요. 갓을 제대로 배우려면 10년 이상은 희생해야 하는데, 너무 길고 고생스럽잖아요.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하지 않고, 맥이 끊길 것 같았지요.
A. 내가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는데, 대구에서 갓일을 처음 시작했어요. 그러다 통영에서 온 장인 선생들을 따라 갓일을 배웠죠. 나중에 통영에 내려가서 세 분에게 배웠는데, 하는 일이 모두 달랐어요. 나는 총모자장, 양태장, 입자장 이렇게 세 가지 과정을 모두 배웠지요.
Q. 힘드실 텐데 왜 다 배우겠다고 하셨어요?
A. 배우려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이분들이 70대였는데, 주변 사람이나 자식들이나, 통영 사람 아무도 배우려고 하지 않았어요. 갓을 제대로 배우려면 10년 이상은 희생해야 하는데, 너무 길고 고생스럽잖아요.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하지 않고, 맥이 끊길 것 같았지요.



갓 제작을 위한 다양한 도구
Q. 지금은 아내분인 도국희 이수자가 함께하고 계시죠.
A. 갓은 혼자서 만들 수 없어요. 일이 힘들고 시간도 너무 걸려요. 옆에서 내가 고생하다 보니 도와주기 시작했는데, 양태일을 맡아 하다 이수자가 됐어요. 아들도 이 일을 전수받아 조교로 있어요. 갓일은 가족이 함께 해야 해요. 가족이 아니면 기술이 보존되지 않아요. 늘 함께 붙어 있어야 하니까요.
Q. 통영갓이 유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예전부터 전국적으로 갓을 만들었지만 통영이 대명사였어요.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이던 이순신 장군이 통영에서 소목이나 여러 장인을 모아 12공방을 경영했는데, 전국의 기술 좋은 장인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죠. 그때 갓 장인도 있었어요.
본래 통영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을 통제영으로 줄여 부르다 붙은 지명이다. 초대 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은 통제영에 12공방을 차려 각종 군기를 만들어 전란에 대비하려고 했다. 나전칠기, 가구, 활, 주조, 안장, 갓과 세공 등이 있었다. 평시에 이곳에선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이나 품질 좋은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통영장, 통영갓, 통영소반 등은 전국에서 으뜸으로 쳤다. 사대부들은 통영장을 가지려고 계를 조직했고, 통영자개는 규방 여인들의 ‘잇템’이었다. 통영갓을 써야만 조선 멋쟁이였다.
A. 갓은 혼자서 만들 수 없어요. 일이 힘들고 시간도 너무 걸려요. 옆에서 내가 고생하다 보니 도와주기 시작했는데, 양태일을 맡아 하다 이수자가 됐어요. 아들도 이 일을 전수받아 조교로 있어요. 갓일은 가족이 함께 해야 해요. 가족이 아니면 기술이 보존되지 않아요. 늘 함께 붙어 있어야 하니까요.
Q. 통영갓이 유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예전부터 전국적으로 갓을 만들었지만 통영이 대명사였어요.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이던 이순신 장군이 통영에서 소목이나 여러 장인을 모아 12공방을 경영했는데, 전국의 기술 좋은 장인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죠. 그때 갓 장인도 있었어요.
본래 통영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을 통제영으로 줄여 부르다 붙은 지명이다. 초대 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은 통제영에 12공방을 차려 각종 군기를 만들어 전란에 대비하려고 했다. 나전칠기, 가구, 활, 주조, 안장, 갓과 세공 등이 있었다. 평시에 이곳에선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이나 품질 좋은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통영장, 통영갓, 통영소반 등은 전국에서 으뜸으로 쳤다. 사대부들은 통영장을 가지려고 계를 조직했고, 통영자개는 규방 여인들의 ‘잇템’이었다. 통영갓을 써야만 조선 멋쟁이였다.

갓일장 정춘모 장인

아내인 도국희 이수자
Q. 옆에서 잠시 지켜보니 갓 만드는 과정이 보통 힘든 게 아니네요.
A. 갓 만드는 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에요. 당시 양반은 머리에 얹는 것에 자긍심이 강했어요. 그런 만큼 갓을 무척 까다롭게 고르고, 갓에 투자를 많이 했지요. 촘촘하고 윤기가 반짝반짝 흐르는 것을 상품(上品)으로 여겼어요. 당시 유림의 갓에 대한 사치는 요즘 여성이 꾸미는 것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양반들의 안목이 올라가고, 당연히 만드는 사람의 기술이 고도화하고 품질도 좋아졌죠. 한데 기술이 어려워지면서 아무도 배우려고 하지 않죠.
Q. 요즘엔 누가 갓을 구입하나요?
A. 많지 않아요. 정부에서 해마다 소량을 구입해줘요. 공연이나 무대에 서는 사람들이 간혹 내가 만든 갓을 갖고 싶어 해서 찾기도 합니다. 박물관이나 지방의 문중에서 제사 때 쓰기 위해 사 가기도 하고요.
A. 갓 만드는 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에요. 당시 양반은 머리에 얹는 것에 자긍심이 강했어요. 그런 만큼 갓을 무척 까다롭게 고르고, 갓에 투자를 많이 했지요. 촘촘하고 윤기가 반짝반짝 흐르는 것을 상품(上品)으로 여겼어요. 당시 유림의 갓에 대한 사치는 요즘 여성이 꾸미는 것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양반들의 안목이 올라가고, 당연히 만드는 사람의 기술이 고도화하고 품질도 좋아졌죠. 한데 기술이 어려워지면서 아무도 배우려고 하지 않죠.
Q. 요즘엔 누가 갓을 구입하나요?
A. 많지 않아요. 정부에서 해마다 소량을 구입해줘요. 공연이나 무대에 서는 사람들이 간혹 내가 만든 갓을 갖고 싶어 해서 찾기도 합니다. 박물관이나 지방의 문중에서 제사 때 쓰기 위해 사 가기도 하고요.

정춘모 장인과 공예가 김덕호 작가가 협업한 대우 양태 테이블 조명 © 예올

감색 연미색 대우 테이블 조명 © 예올
Q. 예올에서 올해의 장인으로 선정되고, 현대 디자이너들과도 협업을 하셨어요.
A. 처음 해본 작업이었어요. 예올에서 제의가 왔을 때 앞으로 가야 할 길이라고도 생각했어요. 제자들도 앞으로는 이런 협업이 필요하겠구나 싶어서 그 길을 열어주고 싶었고요.
A. 처음 해본 작업이었어요. 예올에서 제의가 왔을 때 앞으로 가야 할 길이라고도 생각했어요. 제자들도 앞으로는 이런 협업이 필요하겠구나 싶어서 그 길을 열어주고 싶었고요.

2020년 예올이 뽑은 ‘올해의 장인’ 전시 풍경
Q. 결과는 만족스러웠나요?
A. 좋았어요. 기존에 하던 작업에서 한 단계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죠. 앞으로도 비슷한 기회가 계속 있을 것 같아요. 통영시에서도 그렇고, 강남구청에서도 여러 제의를 해오고 있어요. 어떤 식으로든 갓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우리 외에는 없다는 생각을 해요.
A. 좋았어요. 기존에 하던 작업에서 한 단계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죠. 앞으로도 비슷한 기회가 계속 있을 것 같아요. 통영시에서도 그렇고, 강남구청에서도 여러 제의를 해오고 있어요. 어떤 식으로든 갓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우리 외에는 없다는 생각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