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가을에 만난 종묘
종묘의 가을은 분주하다. 종묘대제가 있고, 10월의 단풍을 맞이해야 한다. 아름다운 종묘의 가을을 담는다.
조선 왕실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 종묘. 유교적 세계관에 기초한 조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장소로, 경건하면서도 편안하고 웅장하면서도 소박한 매력이 교차하는 곳이다. 종묘대제가 열리는 가을의 종묘를 찾아가 본다.

추계제향에서 제례악을 연주하는 악사들의 모습

11월 첫 번째 토요일, 종묘 추계제향
유교적 세계관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갈음할 수 있다. 개인의 마음가짐이 가족으로, 국가로, 천하로 확대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조선에서 제사는 천하의 근본을 세우는 일이었고, 왕실의 제사는 가장 큰 국가 행사였다. 종묘는 조선 왕실의 왕과 비 신위를 모시고 돌아가신 임금님께 제사를 모시는 곳이었고, 종묘대제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종묘제례는 계절별로 한 번씩 정시제를 지냈으며, 나라에 경사나 흉사가 생기면 임시제를 추가로 지냈다. 하지만 일제의 강압에 순종 대에 폐지되었다가 1969년 왕가 후손인 전주 이씨의 대동종약원에 의해 재개되었다. 현재 종묘대제는 5월과 11월 두 차례 지내는데, 둘의 성격은 다소 다르다. 5월 첫 일요일에 열리는 춘계제향이 문화 행사의 면모가 강하다면, 11월 첫 토요일에 거행되는 추계제향은 왕실 종친의 제례 위주라고 할 수 있다.

종묘는 건축물 자체에서도 고요하면서도 엄숙함을 느낄 수 있다.

추계제향은 전주 이씨의 대동종약원에서 주관한다.

제례악의 편경 연주 악사

종묘제례의 진행 절차는 시대별로 조금 다르지만 <국조오례의>에 따른 순서는 왕의 재계로 시작되었다. 왕은 제례 8일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음식을 간소하게 먹으며 불길한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제례 하루 전에는 종묘의 재궁(재실, 어재실, 어숙실이라고도 한다)으로 이동했다. 복잡해 보이지만 신을 부르고, 대접한 후, 보내드린다는 점에선 일반 가정 제사와 다르지 않다. 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고, 행사를 보조하는 직책이 27개나 될 정도로 규모가 크고, 제례의 모든 단계에 종묘제례악(음악과 춤)을 사용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가을 풍경이 아름다운 종묘

종묘의 역사
종묘의 건축 연도는 조선의 개국과 같은 1394년으로 조선 왕실과 역사를 함께했다. 왜란으로 조선이 위기를 맞이했을 때에는 종묘도 아픔을 겪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란으로 왕실이 피란을 떠날 때면 왕실은 종묘에 모신 선대 임금의 신주부터 챙겼다. ‘신줏단지 모시듯’이라는 관용어가 실제 이렇게 사용됐다. 임진왜란으로 몽진에 오르면서 선조는 신주부터 챙겼다. 종묘에서 신주를 꺼내 50여 필의 말에 ‘모시고’ 개성까지 이동했다. 더는 신주를 가져가기 힘들어지자 땅에 조심스레 묻고 선조 일행은 신의주로 도망쳤다. 신의주에서 중국 망명을 타진하면서 선조는 개성으로 신하를 보내 신주를 옮겨 오도록 명령했다. 종묘는 왜군의 주둔지가 되었는데, 사람이 없는 신실에서 밤마다 울음소리가 나고 이유 없이 병사들이 피를 쏟으며 죽는 일이 벌어졌다. 왜적은 종묘에 불을 질렀다. 이후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터만 남은 종묘에서 대성통곡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궁궐보다 먼저 종묘 복원에 나섰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 왕실은 강화도로 도망칠 계획이었는데, 고작 3,000명의 청나라군에 강화도가 점령되면서 남한산성으로 피란처를 옮기게 되었다. 문제는 왕실 신주들을 먼저 강화도에 보냈다는 사실이었다. 인조는 영부사 윤방을 강화도로 보내 신주를 모셔 오도록 했다. 윤방은 청나라 군대가 점령한 강화도에서 간신히 신주를 빼내 왔지만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신주를 노비의 걸레와 함께 가마니에 담아서 모욕했다는 이유였다. 조선에서 왕과 비의 혼을 모신 신주는 가장 중요한 상징물이었고, 신들의 공간인 종묘는 가장 근엄한 공간이었다.

19실로 이루어진 종묘의 정전

세계유산임을 알리는 종묘의 안내석

프랭크 게리가 사랑하는 공간
종묘는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중앙에는 가장 넓은 정전이, 서쪽에는 영녕전이 있다. 정전과 영녕전 앞에는 박석을 깔아놓은 마당 비슷한 공간이 있는데, 월대라고 한다. 정전의 동쪽으로 나가면 위쪽으로 전사청, 아래쪽으론 재궁이 있다. 재궁은 종묘제례를 지내기 전날 왕이 하루를 묵는 공간이고, 전사청은 제례에 올릴 음식을 검사하는 곳이다. 전사청에서 제수를 확인하는 일은 왕이 직접 담당했다. 재궁 옆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신위를 모신 향대청이 보인다. 종묘에 고려왕의 사당을 세운 까닭은 조선이 고려를 계승했음을 알리는 상징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종묘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정전이다. 정전을 둘러싼 담의 정중앙에는 작은 문이 나 있다. 조선 왕실의 신령이 드나드는 문으로 남신문이라고 한다. 담의 동쪽과 서쪽에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규모가 다르다. 동문으로는 왕이, 서문으로는 악공 등이 출입하기 때문에 크기에 차이를 둔 것이다. 정전 안으로 들어서면 몇 개의 계단 위로 지상보다 1m 남짓 높은 마당, 월대가 나온다. 가로 109m, 세로 69m의 넓은 공간에 가로세로 45cm 정도의 박석을 깔아둔 돌마당, 월대에서 정전으로 가는 길은 3개다. 중앙에 검은 벽돌을 매끄럽게 깔아놓은 길(신로)은 혼령을 위한 것이니 밟지 말아야 한다. 왕은 울퉁불퉁한 오른쪽 길을 따라 걸었다. 신로를 제외한 길을 거칠게 설계한 까닭은 왕을 포함한 사람들이 종묘에서 경박하게 움직이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천천히 조심해서 경건하게 걸으라는 의미다. 월대를 지나면 좌우로 101m 길이가 되는 단순하면서 장엄한 건축물, 정전에 도착한다. 정전의 기본 단위는 신실이다. 신위를 모신 방이란 뜻이다. 정전은 19개의 신실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 끝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부터 각 방에 왕과 비의 신위를 모신 신실이 배치되다 보니 정전은 이렇게 긴 건축물이 되었다(정전은 단일 목조건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 정전이 처음부터 지금처럼 긴 건축물이었던 건 아니다. 1394년 처음 문을 열 당시의 정전은 신실이 7개였는데, 조선 왕실이 27대나 이어졌기 때문에 자리가 부족했다. 여러 번에 걸쳐 증축하면서 종묘는 현재와 같은 19실 규모로 길어졌다. 그런데 27대가 지속했으면 19실로도 부족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 답이 바로 영녕전이다. 정전에는 공이 커서 ‘불천지주’로 인정받은 왕과 비의 신위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밖에는 영녕전에 모셨다. 영녕전의 구성이 정전과 다르지 않지만 규모가 작은 이유도 그래서다.

길게 늘어선 종묘의 기둥

종묘의 대문인 외대문에는 궁궐과 달리 현판도 달려 있지 않다. 신의 공간이기에 불필요한 장식적 요소를 최소화한 것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 이외에는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다. 나무에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주칠로 마감하고 기와 밑면의 마구리 부분만 녹색으로 칠했다. 직경 40cm가 조금 넘는 20개의 기둥도 꾸밈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기다랗게 배치되어 있다. 기능만 남긴 건축물의 질박함은 편안함을 준다. 하지만 역사의 무게를 담고 길게 이어져 규모의 웅장함을 품었다. 그래서 정전은 경건함과 편안함, 웅장함과 소박함을 모두 느끼게 해준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과 월트디즈니 콘서트홀로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종묘를 세계 최고의 건축물로 생각했다. 오로지 종묘를 감상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한국을 방문하곤 하던 프랭크 게리는 “종묘처럼 고요하고 엄숙한 공간은 기적이나 다름없다”라고 말한다. 월대의 위와 아래에서 바라보는 장면은 극적으로 다르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종묘에는 가을에 산책하기 좋다.

종묘의 가을 풍경
가을의 종묘는 풍경부터 아름답다. 하지만 종묘는 그 이상의 감동을 선사한다. 봄이 한 해를 시작하는 설렘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한 해를 정리하는 차분함의 계절이다. 이는 종묘에서 열리는 제례에서도 느껴진다. 축제처럼 성대하게 치르는 5월의 춘계제향에 비해 11월 첫 토요일에 거행하는 추계제향은 한결 소박하다. 그렇지만 어쩌면 종묘의 질박한 경건함은 추계제향에서 본모습이 더 잘 드러나는지도 모른다. 추계제향의 엄숙한 제례의식에선 노래와 기악, 춤이 조화를 이룬 종묘제례악을 감상할 수 있다. 장엄한 노랫가락과 절제된 일무의 춤사위는 종묘가 담은 세월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종묘를 도는 데에는 1시간 정도 걸리는데, 좀 더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싶다면 청계천과 창덕궁 후원인 비원, 대원군의 거처이던 운현궁 등으로 발길을 이어도 좋다.

서울에서 머물 곳: 롯데호텔 서울
가을의 정취를 가득 느끼고 싶다면 종묘에서 숙소인 롯데호텔 서울까지 걸어가면 좋다. 종로3가를 가로질러 청계천길을 걷다 삼일교를 지나 을지로 입구까지 30분 정도 소요된다. 청명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산책하기 좋은 거리다.
을지로 입구 소공동에 위치한 국내 최고이자 대표적인 럭셔리 비즈니스호텔이다. 모두 1,015실 규모의 객실은 인테리어 회사 네 곳이 참여해 설계하여 독창적이며 최신 트렌드가 잘 반영돼 있다. 명동과 을지로, 청계천 등 서울의 중심 관광지로의 접근성이 뛰어나 비즈니스와 관광 모두 만족시켜준다. 가족 모임과 럭셔리 웨딩, 대규모 국제회의를 진행하는 것은 물론, 해외 국빈이나 VIP 고객을 모시기에 최적의 장소로 유명하다.

주소 서울시 중구 을지로 30
전화 +82-2-771-1000
홈페이지 www.lottehotel.com/seoul-hotel
2022. 10 에디터:하재경
글: 이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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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10
  • 에디터: 하재경
    글: 이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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