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 중흥기를 전해준 무령왕릉으로 떠나자
무령왕릉은 단순한 왕의 무덤이 아니다. 백제가 가장 부흥하던 시기인 웅진백제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문화재다. 백제를 찾아 그곳으로 향했다.
신라의 흔적을 찾기 위해 경주로 향한다면, 백제의 흔적은 공주와 부여에서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 중원 고대사의 중심 국가이던 백제. 그럼에도 유물이나 유적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실체를 알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무령왕릉은 백제사 연구의 전환점이 된 유적이다. 무령왕릉의 화려하고 다양한 유물은 백제 중흥기를 흥미진진하게 전해준다.

돌로 만든 굴식돌방무덤 입구
700년 역사의 유물
1971년 충남 공주시 송산리의 고분군에서 5호분과 6호분 사이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벽돌이 발견됐다. 안쪽으로 통로가 보였는데, 그 안쪽에서 신분을 알려주는 지석과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진묘수 등이 함께 발굴되었다. 자세히 조사해보니 무령왕릉과 왕비가 안치되어 있는 왕릉이었다.
기원전 18년 한강 유역에서 출발한 이후 백제는 475년까지 거의 500년간 지금의 서울 동남부 잠실 일대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백제는 개로왕이 죽고 공주의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500년, 금강 유역에서 다시 200년 가까운 영화를 영위하다가 660년 멸망했다.
기원전 18년 한강 유역에서 출발한 이후 백제는 475년까지 거의 500년간 지금의 서울 동남부 잠실 일대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백제는 개로왕이 죽고 공주의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500년, 금강 유역에서 다시 200년 가까운 영화를 영위하다가 660년 멸망했다.


무령왕릉 북벽 내부
700년 역사의 백제에 관심이 덜 몰린 데는 유물이나 유적이 부족했던 탓이 크다. 백제 유물의 정수로 꼽히는 금동대향로는 1993년이 되어서야 부여의 주차장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한성백제의 주요 유적인 풍납토성조차 1997년에야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을 정도다. 왕이나 귀족의 무덤은 고대 유물이 대거 발굴되는 보물 창고나 마찬가지인데, 백제 왕릉은 대부분 도굴된 상태여서 이렇다 할 유물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1971년 발견된 공주 무령왕릉은 예외였다. 백제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무덤 주인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다를 통해 세계와 교류하던 백제의 옛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고분 유물전시관
신비에 쌓인 백제 역사의 문
공주 송산리가 백제 왕실 묘지였다는 사실은 1920년대에 이미 밝혀졌다. 일본인 학자 가루베 지온이 1927년부터 백제의 왕실 무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1933년에는 조선총독부 주도로 6호분의 내부 조사도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많은 백제 유물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다 거의 40년이 지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된 것이다.
도굴되지 않은 고대 유물의 대대적 발굴은 일대 사건이었다. 모든 뉴스와 시선이 그곳으로 몰렸다. 그런 탓에 발굴이 너무 급하게 이루어져 졸속 논란까지 일었다. 발굴 현장의 취재 과정에서 사진기자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사고가 벌어질 정도였다.
도굴되지 않은 고대 유물의 대대적 발굴은 일대 사건이었다. 모든 뉴스와 시선이 그곳으로 몰렸다. 그런 탓에 발굴이 너무 급하게 이루어져 졸속 논란까지 일었다. 발굴 현장의 취재 과정에서 사진기자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사고가 벌어질 정도였다.

무령왕릉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 양식으로 지어졌다.

문양전

무령왕릉 입구를 지키던 석수. 국보 제162호다.
신비의 왕이 만든 강국, 웅진백제
무령왕릉은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은 벽돌로 만든 무덤이다. 벽돌무덤은 주로 중국 왕실에서 사용했다. 널방으로 통하는 벽돌길 입구에는 석판(묘지석) 두 장이 서 있고, 그 뒤에는 뿔과 날개가 달린 진묘수 석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진묘수는 중국 후한대부터 등장한 상상의 동물이다. 사람의 영혼을 신선 세계로 인도한다고 믿었다. 벽돌무덤과 진묘수는 무령왕 시기 백제가 바닷길을 통해 중국 남조와 교류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무령왕은 출신부터 신비에 쌓인 인물이다. 누구의 아들인지 기록이 분분하며, 일본의 한 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언제 한반도로 건너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501년 흔들리는 왕권을 안정시키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백제를 다시 일으켜세웠다. 이 과정에서 외교력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무령왕은 출신부터 신비에 쌓인 인물이다. 누구의 아들인지 기록이 분분하며, 일본의 한 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언제 한반도로 건너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501년 흔들리는 왕권을 안정시키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백제를 다시 일으켜세웠다. 이 과정에서 외교력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왕릉원의 가을 풍경
521년 양나라에 보낸 국서를 보면 무령왕은 “고구려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선언했다. 양나라도 이를 인정하고 무령왕을 ‘영동대장군’으로 책봉했다. 능의 입구 묘지석에도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께서 계묘년(523년) 육십이세로 돌아가셨다. 을사년(525년) 8월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 모시고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무덤 주인이 백제 무령왕임을 알려준 것이다.
또 여기에 적힌 생몰 시기가 <삼국사기>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역사상의 연도 기록을 정확하게 특정했기 때문에 이후 삼국시대의 사건 발생 시기를 유추하는 지표가 되는 동시에 나라 간 경제 교류 사실을 확인하는 물증이 되기도 했다.
또 여기에 적힌 생몰 시기가 <삼국사기>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역사상의 연도 기록을 정확하게 특정했기 때문에 이후 삼국시대의 사건 발생 시기를 유추하는 지표가 되는 동시에 나라 간 경제 교류 사실을 확인하는 물증이 되기도 했다.

백제역사 유적지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물로 보는 다양한 역사의 흔적
무령왕릉의 지석에는 토지신에게 묘지를 매입한다는 구절이 적혀 있고, 지석 위에는 양나라의 오수전 90매가 토지 대금으로 놓여 있었다. 이 화폐는 무령왕이 사망한 523년에 처음 발행되었다. 화폐 발행 직후 혹은 초기에 백제까지 흘러 들어왔다는 점은 백제와 양나라의 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왕과 왕비의 목관 재료인 금송은 일본 남부에서만 자라는 귀한 나무인데, 목관 제작에 소요되는 시간을 고려하면 백제는 이미 상당한 양의 금송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무령왕 금제관식

오수전

무령왕 부부의 나무관
능에선 많은 부장품도 발견됐다. <구당서>에 따르면 백제왕은 황금 장식을 한 검은 비단 모자를 썼다고 하는데, 무령왕릉의 왕과 왕비 금제 관장식은 기록과 일치했다. 무령왕릉의 금제 관장식은 얇게 편 금판을 인동초와 꽃무늬로 오려서 만들었다. 고구려와 중국 남조의 문양을 백제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정교한 세공도 뛰어나지만 순금에 가까운 순도도 놀랍다. 80% 안팎의 신라 금관보다 훨씬 순도가 높다. 이 밖에도 무령왕릉에선 베개와 발받침, 장신구, 금동 신발, 용봉 무늬 환두대도, 청동거울, 유리 동자상 등 당시 백제의 화려한 부장품이 대거 발견되었다.
무령왕릉과 공주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과거 웅진백제의 주성이던 공산성이 자리한다. 백제 때 웅진성으로 불린 이 성은 고려 시대에 이르러 공산성으로 불렸다. 공산성에서 바라보는 금강의 풍광은 유려하다. 또 공산성 앞에는 맛난 식당도 즐비하다. 눈과 입의 즐거움을 채우고 숙소로 돌아오면 알찬 역사 여행의 하루가 저문다.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왕릉로 37
문의 +82-41-856-3151
운영시간 09:00~18:00
웹사이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무령왕릉과 공주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과거 웅진백제의 주성이던 공산성이 자리한다. 백제 때 웅진성으로 불린 이 성은 고려 시대에 이르러 공산성으로 불렸다. 공산성에서 바라보는 금강의 풍광은 유려하다. 또 공산성 앞에는 맛난 식당도 즐비하다. 눈과 입의 즐거움을 채우고 숙소로 돌아오면 알찬 역사 여행의 하루가 저문다.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왕릉로 37
문의 +82-41-856-3151
운영시간 09:00~18:00
웹사이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에서 머무를 곳: 롯데리조트부여
무령왕릉에서 차로 30여 분 거리에 롯데리조트부여가 있다. 지하 1층, 지상 10층, 310개 객실 규모의 롯데리조트부여는 세계유산도시 부여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웅장한 현대식 건물이다. 말굽 모양으로 휜 형태의 건물 외관에 붙은 300개가 넘는 색색의 패널이 독특한 풍경을 연출하는 롯데리조트부여에서 또 다른 부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소 충남 부여군 규암면 백제문로 400
문의 +82-41-939-1000
홈페이지 롯데리조트부여
주소 충남 부여군 규암면 백제문로 400
문의 +82-41-939-1000
홈페이지 롯데리조트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