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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돼지, 당신은 누구시기에
이렇게 침샘을 자극합니까? 흑돼지를 찾아 떠나는 시간 여행!
“1980년대 후반 재래종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암퇘지 4마리와 수퇘지 1마리를 구입해 순수 계통 번식에 나서 농가에 7,000마리 이상을 보급했고, 265마리는 축산진흥원에 보존 중이다.”
제주흑돼지

제주에서 돼지는 마을 축제의 귀한 식자재였다. 서로 고기를 서로 나누는 ‘추렴’은 소보다 돼지가 인기였는데, 간과 허파 등 내장은 친척이나 이웃에게 먼저 나눠주는 풍습이 있었다.

즐거운 제주도 식도락 여행
섬인 제주도에서 옥돔이나 갈치, 고등어 같은 해산물의 인기는 자연스럽지만 흑돼지가 별미로 꼽히는 것은 어찌 보면 신기한 일이다.
체구가 작고 다리와 주둥이가 길며, 안면 주름이 있고 턱이 곧은 흑돼지는 원래 우리나라의 토종 돼지였다. 조선 후기까지 제주도뿐 아니라 강화, 사천, 정읍 등 우리나라 각지에서 사육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1908년부터 일제가 재래종 돼지의 생산성 문제를 들어 외래 품종과 교잡을 통해 품질 개량을 시도하면서 재래종 흑돼지의 개체수가 급감한다.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이다. 소나 개의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진행되면서 많은 종이 사라졌다.
1980년대 후반 신토불이 열풍을 타고 재래종 연구가 활발해졌다. 제주축산진흥원은 산간 오지에서 암퇘지 4마리와 수퇘지 1마리를 구입해 순수 계통 번식에 나섰다. 그 결과 농가에 7,000마리 이상을 보급했고, 265마리는 축산진흥원에 보존 중이다(2017년 12월 기준). 축산진흥원의 흑돼지는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 제550호다.
제주도 흑돼지는 완전한 재래종이라고 보긴 어렵다. 순수한 재래종은 사육 효율성이 너무 떨어진다. 그래서 제주도에선 경제성이 허락하는 선에서 재래종의 특성을 최대한 살린 흑돼지를 사육하고 있다. 완전하진 않아도 제주 흑돼지를 토종 또는 재래종이라고 불러도 크게 과장되진 않을 것이다. <제주밥상 표류기>의 저자 양희주는 “엄밀히 따지면 순수 혈통은 아니다. 그러나 교접할 때 재래종의 비율을 최대한 높여 육질이 토종 재래 돼지에 가장 가깝다. 족보를 따지자면 성골은 못 되어도 진골은 되는 셈”이라고 설명한다.
제주흑돼지

우리 역사 속 돼지
인간이 돼지를 사육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1만~6,000년경으로 추정한다. 국내에선 구석기시대부터 돼지가 서식했다. 평안남도 검은모루동굴과 덕천 승리산, 충북 청원의 두루봉 유적 등에서 발굴한 멧돼지 뼈와 화석이 증거로 남았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선 개와 돼지 뼈가 함께 출토되기 때문에 이즈음부터 멧돼지를 가축화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우리 조상은 오래전부터 돼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후한서>의 동이열전 부여국 편에는 동명왕의 부여 건국 이야기가 나온다. 색리국의 왕이 출타 중에 임신한 시녀를 죽이려다 옥에 가두었고, 얼마 후 동명이 태어났다. 왕은 동명을 죽이려고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어주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돼지를 우리에 가두고 키웠음을 알 수 있다. 부여에서 나온 고구려 역시 멧돼지를 사육했다. <북사> 열전의 고구려 편에서는 고구려의 혼인 풍습을 이렇게 설명한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시킨다. 남자 집에서는 돼지고기와 술만 보낼 뿐이지 재물을 보내주는 예는 없다. 만일 여자 집에서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수치스럽게 여기며 ‘딸을 계집종으로 팔아먹었다’고 한다.” 간소한 결혼 문화와 더불어 고구려인의 삶에 돼지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삼국사기>에는 제물용 돼지의 다리 근육을 끊은 이들이 처벌받는 내용이 등장한다. ‘희생(犧牲)’이라는 단어는 원래 하늘이나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바치는 제물을 뜻했다. 얼룩 없이 흰 소를 ‘희(犧)’라고 하고, 죽인 제물을 ‘생(牲)’이라고 했다. 이후 희생은 전쟁 포로인 사람에게도 이르는 등 다양해졌지만, 한자의 소 우(牛) 자를 봐도 중국에선 소를 제물로 활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돼지를 희생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제주흑돼지

흑돼지는 개량종에 비해 작고, 사료값도 더 드는 데다, 새끼도 적게 낳는다. 하지만 제주 사람에게 흑돼지는 자존심이다. 이 쫄깃한 식감을 대신할 품종을 찾기 쉽지 않다고 말한다.

“제주도에선 돌로 돼지우리를 쌓고, 한쪽 돌담 위에 ‘통시(화장실의 제주 방언)’를 만들었다. 그래서 제주도의 화장실을 ‘돗통시’라고 부른다. 돗통시에는 벽도, 눈비를 막아줄 지붕도 없었다. 사람이 배변을 위해 통시에 쭈그리고 앉으면 돼지가 달려와서 먹을 준비를 했다.”
고구려 돼지, 제주에 상륙하다
이렇게 만주에서 중요한 가축으로 사육한 돼지는 한반도 남부로 전해졌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마한의 서쪽 바다에 ‘주호’라는 큰 섬이 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주호는 제주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주호 사람들은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제주축산진흥원은 제주도에서 야생 멧돼지 사육이 시작된 시기를 0~400년 사이로 추정한다.
버크셔나 요크셔, 듀록 등 외래종이 인기를 얻은 한반도 내륙과 달리 제주도에서 토종 흑돼지가 명맥을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역적 고립성 때문에 품종 개량이 쉽지 않았다는 가설을 들 수 있다. 사실 한반도 내륙에도 흑돼지 품종이 이어져온 곳이 있다. 바로 지리산이다. 지리산 역시 교통이 힘든 지역이란 특성을 지녔다. 제주도와 지리산 사이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날씨가 온화한 산간 지역이란 점이 그것이다. 일본의 오키나와 역시 동북아시아의 대표적 돼지 사육지인데, 기후가 따뜻하다. 이런 지역의 돼지들은 지방층이 따로 분포하지 않고 고기 안쪽으로 흩어져서 마블링을 형성하기 때문에 지방의 총량이 상대적으로 낮음에도 맛이 고소하다. 지방 총량이 적으므로 쫄깃한 식감도 일품이다. 불포화지방산과 단백질 함량이 높아 영양 면에서도 우수하다.
흑돼지에는 ‘똥돼지’라는 또 다른 별칭이 있다. 정말 제주도 흑돼지는 사람 똥을 먹고 자랄까? 예전에는 그랬다. 제주도에선 돌로 돼지우리를 쌓고, 한쪽 돌담 위에 ‘통시’를 만들었다. 그래서 제주도의 화장실을 ‘돗통시’라고 부른다. 돗통시에는 시선을 가려줄 벽도, 눈비를 막아줄 지붕도 없었다. 사람이 배변을 위해 통시에 쭈그리고 앉으면 돼지가 달려와서 먹을 준비를 했다. 이렇게 돼지에게 사람 똥을 먹인 것은 음식을 아끼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지금도 시골에선 닭장 위에 토끼집을 2층으로 올리곤 한다. 토끼 똥이 닭의 면역력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돼지에게도 똥을 먹였다. 사람 똥보다 돼지 똥이 거름으로 만들기 좋은 까닭도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 이유로 예전에는 돼지우리와 사람의 화장실을 하나로 묶었던 것이다. 그리고 뱀이 많은 제주도의 특성도 돼지를 키우는 데 일조했다. 돼지는 뱀을 발견하면 생으로 삼키는 천적이다. 죽어서 고기를 주고, 살아선 울타리를 지켜주는 친구였던 셈이다. 돗통시는 제주도만의 풍속이 아니었다. 함경북도, 강원도,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에 같은 형태의 화장실 문화가 존재했고, 중국의 산둥성과 산시성, 일본의 오키나와, 필리핀에서도 돼지로 인분을 처리했다. 돗통시 문화는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제주흑돼지

제주흑돼지

제주 흑돼지 비계는 쫄깃하고 고소하다. 이 고기를 굽기도 하고, 삶아서도 먹는다.

흑돼지 배리에이션
제주도 흑돼지를 먹는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 제주도 방식을 따르면 된다. 제주도 흑돼지는 멜젓(멸치젓)에 찍어 먹는다. 양념하지 않은 생갈비가 특히 인기다. 숯불구이가 일반적이지만 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내오는 근고깃집에선 연탄불을 이용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는 고기를 굽지 않고 삶아서 먹었다. 제주도에는 제주도식 보쌈과 족발이 있는데, 각각 돔베고기와 아강발이라고 불렀다. 돔베는 ‘도마’의 제주도 사투리이고, 아강발은 ‘어린 돼지의 발’이란 뜻이다.
제주도는 예부터 먹을거리가 부족했다. 땅이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탓에 바다에서 일용할 양식을 얻었다. 돼지는 일상 식자재가 아니라 잔치 음식이었다. 제주도에선 결혼식에 맞춰 돼지를 키우고 도축했다. 그리고 가문의 잔치를 벌였다. 통째로 오랜 시간 푹 삶은 고기를 공평하게 나누는 건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집안 어른 가운데 한 명이 ‘도감’이 되어 이 역할을 수행했다. 고기를 나눠주고, 한참 끓여낸 국물에 제주도의 해초인 모자반을 넣어 ‘몸국’을 건넨다. 특별 대우를 받는 건 단 한 명, 신부뿐이다. 신부는 등갈비를 넣은 접짝뼛국을 받는다.
제주도의 돼지 국물이라면 대부분 고기국수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고기국수는 진한 돼지고기 육수에 멸치 국물을 섞어 만든다. 이 둘의 배합 비율이 가게마다 차이를 만든다. 제주에선 육개장도 소가 아닌 돼지로 만든다. 돼지 뼈와 고사리가 몽글몽글할 때까지 오래 끓여 내는 제주도식 육개장도 별미다. 음식이 귀하니 돼지의 내장도 함부로 취급할 리 없다. 제주도에서는 순대도 내륙과 다른 풍미를 자랑한다. 돼지 막창에 보리와 좁쌀 아니면 메밀을 갈아 넣는다. 순대 소의 대부분은 선지가 차지한다. 익숙하지 않은 이에겐 뻑뻑하고 비릿한 기피 음식일 수도 있지만, 제주 도민들은 순대를 간장에 찍어 먹으며 애정을 표한다. 순대를 국물에 말아 순댓국밥으로 변형한 건 기본이고, 순대국수도 맛볼 수 있다.
제주도에는 이렇듯 돼지고기의 다양한 배리에이션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최고봉은 뭐니 뭐니 해도 ‘엿’이 아닐까 싶다. 제주도에선 꿩을 넣고 엿을 고아 만든 ‘꿩엿’이 있다. 그런데 꿩엿이 가장 유명할 뿐 돼지와 닭을 넣어서도 엿을 만든다. 엿기름에 푹 고아 결대로 찢어놓은 돼지고기엿은 제주가 추구하는 온전한 맛의 지향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2019. 6 에디터:정재욱
글: 이중한
자료제공: 이동혁(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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