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금동대향로(부분), 7세기, 전체 높이 61.8cm,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 joon choi
못다 이룬 백제의 꿈, 부여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왕도였다. 무령왕릉 발굴에서 막대한 양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며 백제 문화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이루어졌으나, 여전히 부여와 백제는 대부분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다. 국립부여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이내옥이 백제 문화의 찬란함과 우리가 부여에 가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한다.
부여와 서울을 왕래한 지도 오래되었다. 부여에 갈 때면 도착 시간을 되도록 해 질 녘에 맞추었다. 공주에서부터는 금강변 국도를 따라 부여에 간다. 다니는 차들이 많지 않아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한적하기만 하다. 마침 뉘엿뉘엿 지는 붉은 낙조가 하늘에 가득하고, 그것이 강물에 반사되어 반짝이면서 강변의 모래색도 더욱 하얗게 빛난다. 강 건너 낮은 산들이 그려내는 능선의 포근함도 시선을 따라 함께 내달린다. 그 길과 순간들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항상 내 마음에 본지풍광(本地風光)의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다.
부여는 백제의 도읍이 되면서 고대 동아시아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당대의 백제 유물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저평가되어온 백제 문화
강은 역사와 함께 흐른다. 백제는 서울에서 공주로, 다시 부여로 천도했다. 공주에서 부여로 옮길 때에도 이 강의 물길을 따라 갔을 것이다. 백제가 멸망하면서 부여가 함락되자 모두 이 강을 따라 공주로 피해 항전했을 것이다. 이런 백제인들의 피와 땀, 희망과 좌절의 역사는 아득히 흘러가버리고, 강물은 언제나 무심하다. 부여로 천도한 성왕은 죽음을 앞두고 말했다.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우리 역사에서 백제는 그동안 저평가되어왔다. 신라와 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철저히 파괴되고 왜곡되었다. 20세기 이후 우리나라 최대의 발굴이라고 평가받는 공주 무령왕릉 발굴 작업에서 막대한 양의 유물이 쏟아져 나옴에 따라 백제 문화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이루어지고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무령왕릉 유물은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의 그것과 같은 성격인데, 상당수 유물이 남조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중국 역사서에도 공주 천도 이후 무령왕 시절에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무령왕릉은 무령왕의 아들 성왕이 조성했다. 백제의 역사와 문화는 성왕 때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무령왕릉은 기존 석실 무덤과는 완전히 다른 묘제였다. 가장 보수적인 묘제를 바꾸었다는 점에서 그의 혁신적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성왕은 불교와 유교 진흥에 힘썼고, 선진 문화 국가를 지향했다. 일본에 많은 문물을 전해주었는데, 특히 성왕이 최초로 전파한 불교는 일본 고대와 중세 정신 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백제는 그동안 저평가되어왔다. 신라와 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철저히 파괴되고 왜곡되었다. 20세기 이후 우리나라 최대의 발굴이라고 평가받는 공주 무령왕릉 발굴 작업에서 막대한 양의 유물이 쏟아져 나옴에 따라 백제 문화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이루어지고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무령왕릉 유물은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의 그것과 같은 성격인데, 상당수 유물이 남조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중국 역사서에도 공주 천도 이후 무령왕 시절에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무령왕릉은 무령왕의 아들 성왕이 조성했다. 백제의 역사와 문화는 성왕 때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무령왕릉은 기존 석실 무덤과는 완전히 다른 묘제였다. 가장 보수적인 묘제를 바꾸었다는 점에서 그의 혁신적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성왕은 불교와 유교 진흥에 힘썼고, 선진 문화 국가를 지향했다. 일본에 많은 문물을 전해주었는데, 특히 성왕이 최초로 전파한 불교는 일본 고대와 중세 정신 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불교 문화를 꽃피운 백제 성왕
학자들은 불교가 중국, 한국을 거쳐 일본에서 꽃을 피운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불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가장 발달된 모습을 일본 중세 불교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하니 그 단초를 연 백제 성왕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기록에 따르면, 성왕이 사신을 보내 당시 최고 명필이던 소자운의 글씨를 수만 금을 들여 사 갔다고 했다. 이런 열정과 관심이 백제를 진정한 문화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만든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백제 문화는 성왕(523-554)이 마련한 기틀 위에서 무왕(600-641)이 꽃을 피웠다. 성왕은 더 큰 꿈을 위해 수도를 공주에서 부여로 옮겼다. 이로써 부여는 백제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고, 201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 부여 주민들은 백제의 왕도였음에 은근한 자부심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읍내 지하 대부분이 유적지여서 건축 등 개발에 많은 제약을 받으며 살아간다. 이런 여파로 일제강점기보다 현대의 인구가 더 줄었다. 이는 왕도의 후예로서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굴레의 측면이기도 하다. 오늘날 관광이 보는 데에서 휴식과 힐링으로 옮겨가는 추세에 비춰보건대, 부여에서도 새로운 전략 구상에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운영 중인 백제역사재현단지의 여러 시설들이 그런 추세를 따라가고 있다.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부분), 7세기, 전체 높이 90.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joon choi
백제는 시대를 초월한 동아시아 미술사에 찬란한 금자탑을 이루었다. 백제 미술품에는 따뜻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지나치지 않으며 포용적이다.
명품의 탄생
부여는 백제의 도읍이 되면서 고대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당대의 백제 유물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예전에 우리나라 모든 국립박물관 소장 유물 걸작 10선을 선정한 적이 있다. 거기에서 백제 유물이 3점이나 뽑혔다.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 백제금동대향로, 백제산경문전이 그것이다. 고대 한반도 삼국 중 하나였고 철저히 파괴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백제 문화의 특별함이 더욱 깊게 와닿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본에서 그 아름다움으로 서로 으뜸을 다투는 고류지(廣隆寺) 미륵반가사유상과 호류지(法隆寺) 백제관음 역시 백제에서 만들었거나 그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유물들은 고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들이다. 과연 어떤 배경에서 이런 명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백제 시대에 해당하는 중국 남북조 시대는 수백 년간 분열되어 무수한 국가가 명멸했다. 이 시기는 기존의 질서와 관념이 무너진 대혼란의 시대였다. 하지만 사상적으로는 불교가 들어와 유교, 도교와 더불어 중국 사상이 풍부해졌다. 문학에서 도연명의 시, 문학비평에서 유협의 문심조룡, 회화 비평에서 사혁의 육품론, 서예에서 왕희지가 출현했다. 산수화가 탄생하고, 실용음악에서 순수음악으로 전환된 시대였다. 중국 문화예술의 근간이 이 시대에 모두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후 전범을 이루었다. 기술에서 예술의 시대로 대전환을 이룩한 것이다. 그래서 그 뒤를 이은 수, 당, 송, 원, 명, 청의 예술이란 남북조 시대의 풀이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다.
백제는 이러한 중국 남북조 문물에 예민한 촉각을 세우고, 실시간으로 수입해서 소화했다.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했으나 짧은 기간 존속했다. 당나라가 들어섰지만 아직 고유의 문화를 형성하지 못했을 때였다. 이때 백제는 남북조 문화를 자기화하고 발전시켜 그 극점까지 끌어올렸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 백제금동대향로, 백제문양전, 미륵사석탑 등과 일본에 있는 백제계 유물들이다. 이렇게 백제는 시대를 초월한 동아시아 미술사에 찬란한 금자탑을 세웠다.
백제 시대에 해당하는 중국 남북조 시대는 수백 년간 분열되어 무수한 국가가 명멸했다. 이 시기는 기존의 질서와 관념이 무너진 대혼란의 시대였다. 하지만 사상적으로는 불교가 들어와 유교, 도교와 더불어 중국 사상이 풍부해졌다. 문학에서 도연명의 시, 문학비평에서 유협의 문심조룡, 회화 비평에서 사혁의 육품론, 서예에서 왕희지가 출현했다. 산수화가 탄생하고, 실용음악에서 순수음악으로 전환된 시대였다. 중국 문화예술의 근간이 이 시대에 모두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후 전범을 이루었다. 기술에서 예술의 시대로 대전환을 이룩한 것이다. 그래서 그 뒤를 이은 수, 당, 송, 원, 명, 청의 예술이란 남북조 시대의 풀이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다.
백제는 이러한 중국 남북조 문물에 예민한 촉각을 세우고, 실시간으로 수입해서 소화했다.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했으나 짧은 기간 존속했다. 당나라가 들어섰지만 아직 고유의 문화를 형성하지 못했을 때였다. 이때 백제는 남북조 문화를 자기화하고 발전시켜 그 극점까지 끌어올렸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 백제금동대향로, 백제문양전, 미륵사석탑 등과 일본에 있는 백제계 유물들이다. 이렇게 백제는 시대를 초월한 동아시아 미술사에 찬란한 금자탑을 세웠다.
백제 미술품에는 따뜻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지나치지 않으며 포용적이다.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대외 관계를 중시했고 개방적이었다. 나라의 인적 구성도 다양했다. 중국 기록에 따르면, 백제에는 신라인, 고구려인, 왜인 등이 섞여 있는데 중국인도 있었다. 그만큼 개방적이고 국제적이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유연성이 고대 동아시아 미술을 융합하여 그 극점까지 끌어올린 힘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백제는 과거의 화석이 아니라 오늘날 여전히 살아 있는 영감의 원천이다. 우리가 백제의 아름다움을 찾아 부여에 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PROFILE
이내옥은 미술사학자다. 34년간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하면서 진주·청주·부여·대구·춘천의 국립박물관장과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 및 아시아부장을 지냈다. 한국미술사 연구와 박물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미국 아시아파운데이션 아시아미술 펠로우십을 수상했다. 저서로 <문화재 다루기>, <공재 윤두서>, <백제미의 발견>, <안목의 성장> 등이 있고, <사찰꽃살문>, <백제>, <부처님의 손> 등의 책을 기획했다.



부여에서 머물 곳: 롯데리조트 부여
지하 1층, 지상 10층, 310개 객실 규모의 롯데리조트 부여는 부여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웅장한 건물일 것이다. 말굽 형태로 휜 형태의 건물 외관에는 300개가 넘는 색색의 패널이 붙어 있다. 독특하지만 우리나라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깔들을 조합해 단정하면서도 아름답다. 또한 해가 저무는 것과 동시에 하나둘 불이 꺼지는 읍내의 건물들과 달리 리조트 인근의 프리미엄 아울렛은 저녁 늦게까지 환하게 불을 밝힌다. 리조트 안에는 가족 단위 여행객이 레스토랑 본디마슬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하며 활기차게 대화를 나눈다. 부여의 또 다른 면을 롯데리조트 부여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과 현대, 고요함과 떠들썩함이 오묘하게 뒤섞인 분위기에서 잠시 가라앉았던 여행의 설렘이 다시 살아난다.
주소 충남 부여군 규암면 백제문로 400
전화 +82-41-939-1000
홈페이지 www.lottebuyeores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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