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user & Wirth Menorca on Isla del Rey. Courtesy Hauser & Wirth . Photo: Daniel Schafer
지중해의 새로운 아트 데스티네이션, 하우저 앤 워스 메노르카
갤러리 하우저 앤 워스가 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의 섬 메노르카에 지난 7월 새로운 아트 센터를 오픈했다.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갤러리인 하우저 앤 워스(Hauser & Wirth)가 왜 이 머나먼 지중해 한가운데의 섬 메노르카, 그것도 본 섬이 아닌 손바닥만 한 작은 섬 이야 델 레이(Illa del Rei, 카탈루냐어로 ‘왕의 섬’을 뜻함)에 갤러리를 오픈했을까. 이 같은 의문은 파란 바다와 초록빛 자연을 품은 갤러리를 보고 나면 금세 사라진다.
Hauser & Wirth Menorca on Isla del Rey. Courtesy Hauser & Wirth. Photo: Be Creative, Menorca
Hauser & Wirth Menorca on Isla del Rey. Courtesy Hauser & Wirth. Photo: Be Creative, Menorca
아트 월드를 이끄는 갤러리 하우저 앤 워스
1992년 이반(Iwan)과 마누엘라 워스(Manuela Wirth), 마누엘라의 어머니인 우르줄라 하우저(Ursula Hauser)가 함께 취리히에 첫 갤러리를 오픈한 하우저 앤 워스는 이제 전 세계 곳곳에 17개의 갤러리를 운영하며 가고시안(Gagosian), 페이스(Pace) 등과 함께 세계 아트 신을 선도하는 컨템퍼러리 아트 갤러리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른바 ‘메가 딜러’라는 이들의 별칭이 얘기해주듯, 그 영향력이 여느 국립 미술관 못지않은 하우저 앤 워스는 독창적 예술 세계를 지닌 아티스트를 발굴해 장기적으로 지원·육성하는 ‘아티스트들의 갤러리’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단순히 부유층이 즐겨 찾는 도시에 갤러리를 오픈해 운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예술 분야의 연구, 역사가 담긴 건축 공간의 복원, 지역사회의 전통과 친환경 요소를 결합한 복합 예술 공간을 제시하며 기존 갤러리와 차별화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많은 사람이 단순히 실내의 예술 작품을 보는 것뿐 아니라 정원을 걸으며 야외에 설치된 조각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해요. 이곳은 예술이 중심이 된 경험을 제공하지만, 그 밖의 다른 다양한 요소가 내재된 예술 공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죠.”
이반 & 마누엘라 워스
스페인의 발레아레스 제도는 오래전부터 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인기 휴양지다. 그중 마요르카는 1830년대에 연인 쇼팽과 조르주 상드,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와 화가 미로가 머물거나 여생을 마감한 곳이자 스페인 왕가의 여름 휴양지로서, 반면 클럽들로 유명한 이비사는 (코로나19 발생 이전에는) 파티를 즐기는 젊은이들의 여행지로서 인기가 높았다. 특히 메노르카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태계 보존구역답게 지중해 특유의 경관과 더불어 동식물이 공존하는 매력으로 사랑받는 곳이다. 무엇보다 이반과 마누엘라 워스가 그들의 서머 하우스에서 여름 동안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Autostat’ (1996) by Franz West on Hauser & Wirth Menorca. Private Collection. Courtesy Hauser & Wirth. Photo: Daniel Schafer
Hauser & Wirth Menorca on Isla del Rey. Courtesy Hauser & Wirth. Photo: Daniel Schafer
마온항의 역사를 되새기는 섬, 이야 델 레이
메노르카에서 여러 여름을 보낸 이들이 메노르카의 주항인 마온 항구 앞 작은 섬 이야 델 레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온항에서 페리를 타고 15분이면 도착하는 이 섬은 18세기 초 영국령에 속해 있던 시절 영국 해군이 세운 병원이 1960년대에 문을 닫으면서 폐허로 남겨진 곳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이곳의 역사를 간직한 병원을 복구하기 위해 2005년 이야 델 레이 병원 재단을 세우고 자원봉사자를 중심으로 주말마다 건물을 손수 복구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잊혀가던 역사를 다시 알리는 데 앞장섰다.
이반과 마누엘라 워스가 이 프로젝트에 대해 듣고 이야 델 레이를 방문할 때만 해도 지금의 갤러리 공간은 폐허가 된 병원의 부속 건물이었다. 당시 재단은 병원 메인 건물을 복원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서 부속 건물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거친 자연환경으로 둘러싸인 이 폐허 안에서 새로운 예술 공간의 가능성을 본 두 사람은 이곳을 복원해 복합 갤러리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섬의 전통과 역사를 지키는 데 중점을 두던 병원 재단과 시에서는 이 제안에 다소 미심쩍은 반응을 보였지만, 워스 부부가 2014년 영국에 설립한 전원 복합 예술 공간 하우저 앤 워스 서머싯(Hauser & Wirth Somerset)을 보고 기꺼이 이들의 계획에 찬성했다. 그 결과 이야 델 레이는 메노르카가 자랑하는 새로운 복합 예술 공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Hauser & Wirth Menorca on Isla del Rey. Courtesy of Hauser & Wirth. Photo: Daniel Schafer
The restaurant ‘Cantina’ at Hauser & Wirth Menorca, designed by Luis Laplace. Courtesy Hauser & Wirth. Photo: Daniel Schafer
“무엇보다 중요했던 점은 기존 건물의 DNA를 이해하는 것이었어요. 그 DNA 중 하나는 이 건물이 버려져 방치되었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이곳에 새로운 삶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새로운 요소를 더해 또 다른 DNA를 부여하고자 했어요.”
루이스 라플라스, 건축가
로컬 문화와 자연을 담은 예술 공간, 하우저 앤 워스 메노르카
하우저 앤 워스 메노르카는 갤러리와 정원, 친환경 농장과 거기서 나는 식자재로 선보이는 레스토랑, 그리고 아티스트 레지던스와 교육 프로그램을 결합해 지난 7년간 약 80만 명이 방문했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 서머싯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유서 깊은 건물의 복원, 지역 문화와 친환경 로컬 가스트로노미의 연계 등 여러 면에서 닮아 있다. 건물의 복원과 건축도 서머싯의 건물을 복원한 아르헨티나 태생으로 파리에 사무소를 둔 건축가 루이스 라플라스(Luis Laplace)가 담당했고, 정원 디자인 역시 절정의 자연미를 보여주는 서머싯의 아우돌프 필드를 디자인한 정원 디자이너 피트 아우돌프(Piet Oudolf)가 맡았다.
오랫동안 하우저 앤 워스와 함께 일해온 루이스 라플라스는 기존 해군 건물의 특성과 지역적 요소를 되살려 아치와 천장 창을 복원함으로써 섬의 햇빛과 어울리는 1,500㎡의 전시 공간과 교육 프로그램을 위한 워크숍 공간, 레스토랑 칸티나(Cantina), 갤러리 숍의 공간을 구성했다. 지붕의 기와와 테라초 바닥 역시 메노르카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소재를 적용했다.
야외에 전시된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거미 동상, 미로와 에두아르도 칠리다(Eduardo Chillida)의 동상들과 함께 산책의 즐거움을 주는 정원 또한 이곳의 매력을 배가해주는 공간이다. 피트 아우돌프는 그의 장기인 다년생 초본식물과 섬에서 서식하는 식물을 이용해 1년 내내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는 이곳의 매력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갤러리와 정원을 감상하고 나면 레스토랑과 갤러리 숍으로 이어지는 칸티나에서의 로컬 와인과 가스트로노미 시식 또한 빠질 수 없다. 레스토랑 칸티나는 메노르카의 젊은 와인메이커이자 레스토랑 비니파뎃(Binifadet)을 운영하는 루이 앙글레와 파트리시아 메넨데즈 커플이 맡아 이 지역의 농수산물 재료로 계절 메뉴를 선보인다. 갤러리 숍에서는 예술 서적과 목공예, 도자기, 신발 등 여러 공예 제품으로 잘 알려진 메노르카의 공예 디자인 제품들을 판매한다.
The restaurant ‘Cantina’ at Hauser & Wirth Menorca, designed by Luis Laplace. Courtesy Hauser & Wirth. Photo: Daniel Schafer
갤러리의 7월 오프닝과 함께 시작된 아티스트 마크 브래드퍼드(Mark Bradford)의 전시와 그와 로컬 아트 스쿨 학생들이 함께 진행한 교육 프로그램 결과물 전시는 여름 시즌이 끝나는 10월 말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가을과 겨울 시즌에는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과 스페인의 가장 오래된 오페라극장인 프린치팔 데 마온 극장(Teatro Principal de Mahón)과 연계한 프로그램을 계속 선보이며, 돌아오는 봄엔 새로운 전시를 열 예정이다. 이야 델 레이의 을씨년스러운 겨울이 지나고 나면, 이미 전 세계 많은 매체의 주목을 받으며 메노르카를 새로운 아트 데스티네이션에 올려놓은 하우저 앤 워스 메노르카를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