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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빛나는 밤, 상트페테르부르크 백야
백야는 하얀 밤이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하늘은 밋밋한 하양이 아닌 노을 빛으로 밤새도록 물들고, 서정미 넘치는 러시아 고전음악의 선율에 파묻힌다.
하얀 밤을 채워줄 보석이 필요하다
지구는 하루 한 바퀴 자전한다. 그래서 지구의 한 지점이 태양과 마주할 때는 낮이 되고, 태양을 등질 때에는 밤이 된다. 그런데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1년 주기로 태양 주위를 도는 공전도 한다. 공전은 계절을 만든다. 기울어 있는 지구 자전축 때문에 북위 48도 이상의 고위도 지역에선 여름이 되면 지구 자전축이 태양을 향해 그대로 노출되어버린다. 지구가 자전을 해도 쏟아지는 햇볕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낮처럼 밝은 밤, 백야(白夜) 현상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북위 48도를 넘어가는 나라에는 러시아, 캐나다, 북유럽 등이 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이 대략 북위 59도, 핀란드의 헬싱키가 60도 정도에 위치한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오슬로나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그 사이에 자리한다. 이들은 모두 백야를 볼 수 있는 도시다. 위도가 더 높은 아이슬란드나 캐나다의 유콘 역시 백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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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일출과 같은 느낌이 드는 상트의 일몰 © Shutterstock

아주 예외적인 기상 현상은 호기심을 부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어두워지지 않는 밤을 체험하고자 북반구의 북쪽 끝을 찾아 떠난다. 하지만 독특한 기상 현상이 안겨주는 감동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영화에 등장하는 백야는 기대만큼 아름답지 않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인썸니아>에서 알래스카의 백야를 매우 황량하게 그려냈다. 해가 지지 않는 밤은 주인공 알 파치노를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악몽일 뿐이다. 2019년 작품 아리 애스터 감독의 공포 영화 <미드소마> 속 백야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백야 시즌 스웨덴의 시골 마을은 한적하고 조용하고 목가적이지만, 그렇기에 그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더 끔찍하게 묘사된다. 실제로 백야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매력에는 한계가 있다. 하얗게 고정된 풍경은 점점 아름다움에서 지루함으로 바뀌기 십상이며, 더 나아가 공포가 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백야가 즐거움으로 남기 위해선 환한 시간을 기쁘게 채워줄 좋은 콘텐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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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넘어 새벽 1시가 다 된 시간의 도시 풍경 © Shutterstock

가장 아름다운 백야의 나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백야를 즐기기 가장 좋은 도시다. 그 첫 번째 근거로는 도시의 역사성과 예술성을 들 수 있다. 제정러시아 시절 표트르대제는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장대하고 화려한 근대식 도시를 목표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후대 차르에게도 이어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200년간 러시아제국의 수도이자 유럽 북부의 대표 도시로 자리를 굳혔다. 나폴레옹전쟁 이후 러시아가 세계 무대의 주역으로 성장하면서 러시아 문화예술의 위상도 높아졌다. 차이콥스키의 음악, 푸시킨의 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표적 문화예술 작품이다. 하얀 밤을 걸으며 바라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축물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사방에 숨어 있는 예술의 흔적과 역사적 의미까지 살펴본다면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사람의 흔적만큼이나 자연 자체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 도시는 발트해로 통하는 북방의 창이기도 하다. 바다로 흐르는 네바강의 물줄기는 도시 곳곳을 관통한다. 베네치아가 유럽 남쪽의 대표적인 수로 도시라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방 수로의 중심지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인구 100만 이상의 메가시티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도시이기도 하다. 위도가 높다는 사실은 백야의 시간이 길다는 뜻과 같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백야의 절정기에는 밤이 한 시간 남짓에 불과해 네바강 변을 붉게 물들인 노을 속에서 황홀한 백야를 더 오래 체험할 수 있다. 매년 5월 말부터 6월 말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노을 빛 백야에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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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때 상트는 밤 열 시를 넘기면서 더욱 분주해진다. © Shutterstock

백야를 축제로 삼는 건 러시아의 전통이기도 하다.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 러시아에선 부족마다 상징 동물을 조상처럼 섬기곤 했다. 그러던 중 농경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러시아는 다신교 사회로 넘어갔는데, 많은 농경문화권에서 그러하듯 태양신이 최고 신의 자리를 차지했다. 태양의 영향력이 가장 강력해지는 백야의 절정이 태양신을 숭배하는 축제 기간으로 자리 잡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른다. 기독교가 러시아정교로 현지화하면서 러시아 사람들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은 이후에도 백야 축제의 전통은 모습을 바꿔 유지되었다. 제정러시아 말기에서 볼셰비키혁명 시기에는 축제의 맥이 끊기는 듯했지만, 1960년대부터는 작은 지역 축제가 하나둘 싹을 틔웠다. 그리고 소련이 무너졌다. 19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소련 시절의 이름인 레닌그라드를 버리고 옛 이름을 회복했다. 1993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근교의 크고 작은 백야 축제를 하나의 대규모 행사로 묶어내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시가 주도한 기획이었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설적 예술가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힘을 보태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백야 축제는 지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예술 축제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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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어둑어둑해지는 새벽 1시의 네바강 풍경. 멀리 ‘피의 구원 사원’이 보인다. © Shutterstock

최고의 지휘자, 최고의 축제를 만들다
1953년생인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닌 모스크바 출신이다. 그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인연은 그가 음악 수재로 인정받아 레닌그라드 음악원으로 유학을 오면서 시작되었다. 1976년, 소련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한 그는 2년 후 키로프 국립오페라의 부지휘자로 임명되었고, 10년 후인 1988년에는 키로프 국립오페라와 발레아카데미의 예술 감독으로 승진했다. 게르기예프는 지휘뿐 아니라 예술 경영에서도 어마어마한 성과를 냈다. 마린스키 극장은 꾸준하게 또한 화려하게 개·보수 및 증축을 통해 외양을 키웠고, 해외 예술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내실을 다졌다. 마린스키 극장의 레퍼토리인 오페라와 발레에서도 사라져가던 러시아의 전통을 되살려내며 전 세계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러시아 예술계의 위대한 차르가 되었다. 그가 이룬 최고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백야 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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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브리스트 광장의 니콜라스 1세 동상 © Shutterstock

상트페테르부르크 백야 축제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그중에서도 ‘백야의 별’은 단연 최고로 꼽힌다. 백야의 별은 1993년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기획한 고전음악 프로그램이다. 그는 전 세계 음악계와 공연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젊은 예술가들을 선정해 백야 축제에 초청했다. 우리나라의 서울시립교향악단(지휘자 정명훈)이나 피아니스트 백건우도 백야의 별에 초청받아 공연한 바 있다. 마린스키 극장과 콘서트홀에서 개최하는 백야의 별 프로그램은 원래 열흘 정도 일정으로 선보이는데, 인기가 많아 공연과 참여자가 꾸준히 늘어났다. 백야가 절정에 달할 때에만 펼쳐지던 공연이 이제는 백야가 자취를 감출 때까지, 거의 세 달에 걸쳐 이어진다. 공연의 종류도 다채롭다. 오페라, 발레, 교향악, 실내악 등 모든 고전음악을 이 기간에 만날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백야 축제를 즐기는 방법이 마린스키 극장과 콘서트홀에서 고가의 공연을 보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 광장에서도 열린 공연에 취할 수 있다.
 

밤 11시가 넘어가면서 상트 거리는 더욱 활기를 띤다. © Shutterstock

젊음의 축제, 희망의 축제
상트페테르부르크 백야 축제의 백미가 백야의 별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고전음악뿐 아니라 영화제나 록음악제 같은 현대예술 축제도 함께 진행한다.
또 여름이 되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학가에선 졸업식이 열린다. 대학 도시이기도 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독특한 졸업 축하 행사가 있다. 6월의 어느 밤 새벽 2~3시 즈음, 아주 짧은 밤이 스치듯 지나고 이른 동이 틀 때면 항구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붉은 돛을 단 범선이 나타난다. 그 위로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하늘을 수놓는다. ‘붉은 돛단배 행사’다. 붉은 돛단배는 1932년에 알렉산드르 그린이 집필한 동명의 동화에서 유래했다.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화로 꼽히는 이 동화는 ‘언젠가 붉은 돛단배를 탄 왕자님이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라는 예언을 믿으며 그를 기다리는 한 가난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꿈을 이루게 된다는 이 내용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졸업생의 여정과 중첩된다. 그래서 1968년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여름이면 붉은 돛단배를 띄워 졸업을 축하하기 시작했다.
올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붉은 돛단배는 6월 20일에서 21일로 넘어가는 시점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진입할 예정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붉은 돛단배 항해와 거리, 극장의 공연이 모두 취소되고 온라인 공연으로 대체한다고 해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만큼은 취소할 수 없다. 어쩌면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더 빛나고 아름답게 도시의 밤을 밝힐지 모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머물 곳: 롯데호텔 상트페테르부르크
롯데호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인 성 이삭 광장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다. 호텔은 1851년에 지은 역사 깊은 건물을 리모델링해 사용하고 있으며, 인근에는 넵스키 프로스펙트 주요 거리와 예르미타시미술관, 마린스키 극장 등이 자리한다.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로 총 10개 타입의 객실 150실을 갖춘 호텔 내부에는 다양한 레스토랑과 시설이 들어서 있다.

주소  2, Antonenko Lane, Saint-petersburg, Russia, LOTTE HOTEL ST. PETERSBURG
전화 +7-812-336-10-00
홈페이지 www.lottehotel.com/stpetersburg-hotel
 
2020. 6 에디터:정재욱
글: 이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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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6
  • 에디터: 정재욱
    글: 이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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