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보라를 해치고
눈보라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영하 30℃의 칠흑 같은 밤, 눈으로 뒤덮인 산길을 감각과 본능에 질주하는 자들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오프로드 경주 대회, WRC 스노 랠리의 세계.
스폰서 브랜드 이름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자동차 한 대가 하얀 설원을 맹렬하게 달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턱 달라붙을 듯 낮게 깔린 범퍼와 사이드 스커트, 후면 지붕에는 거대한 스포일러가 달린 이 험상궂은 인상의 차는 사람이 다니기도 버거워 보이는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중이다. 차 옆으로는 지붕까지 눈이 쌓여 있고, 바퀴 뒤 그보다 더 높은 눈보라를 날리며 말 그대로 미친 듯 질주하고 있다. 간혹 코너링에서 슬립(Slip, 차가 미끄러지는 현상)이 일어나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들에겐 부상이나 차량의 고장보다 1분 1초가 더 급하니까. 그것이 바로 WRC의 일상이다.

© Jaanus Ree/Red Bull Content Pool
오프로드의 최고 강자를 찾아
달리고 뛰기는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 중 하나다. 100년 남짓한 자동차 역사에서 인간은 모터스포츠를 발전시키려 무던히 노력해왔다. 그중 가장 궁극으로 치달은 모터스포츠가 바로 포뮬러 원(Formula One, 이하 F1)과 월드 랠리 챔피언십(World Rally Championships, 이하 WRC)이다. F1과 WRC는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은 모터스포츠다. 1년 내내 전 세계 경기장을 찾아다니며 경기당 승점을 합산해 온로드의 일인자를 찾는 대회가 F1이라면, WRC는 세계 각국의 비포장길을 달리며 오프로드의 일인자를 뽑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단, F1은 1인승이지만, WRC는 메인 드라이버 옆에 코스를 분석하고 차량 상태 등을 점검하는 보조 드라이버가 있다는 부분에서 다르다. 게다가 당일 기후나 선수의 컨디션 등 몇 가지를 제외하면 큰 변수가 없는 F1에 비해 WRC는 날씨는 기본이요, 같은 코스라도 매년 도로 상태가 천차만별이고, 순간순간 동물이나 사람이 길 한복판에서 튀어나올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변수가 선수들을 괴롭히는 무척 터프한 대회다. 오죽하면 F1의 전설, 미하엘 슈마허가 “F1 레이서가 WRC 차를 운전하기보다 WRC 선수가F1 머신을 모는 것이 더 쉽다”라고까지 했을까?

© Jaanus Ree/Red Bull Content Pool
게다가 WRC는 따뜻한 봄날인 3월부터 11월까지 대회를 여는 F1과 달리 1월부터 11월까지 12월을 뺀 나머지 기간에 총 14개국에서 쉬지 않고 강행군을 펼친다. 그 WRC의 포문을 여는 건 각각 1, 2월에 열리는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랠리(Rallye Automobile Monte-Carlo)와 스웨덴의 스웨덴 랠리(Rally Sweden)다. 이 두 랠리는 WRC에서 유일하게 펼쳐지는 눈길 경주라 ‘스노 랠리(Snow Rally)’라 불린다. WRC의 눈길은 그냥 눈길이 아니다. 스웨덴 랠리에서는 무릎까지 차오르는 높이의 눈을 진행 요원이 삽으로 파서 도로를 만들기도 한다.

© Ivo Kivistik / Red Bull Content Pool
최고의 겨울스포츠
1911년부터 시작된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랠리는 2019년을 맞이해 무려 108년이나 된 WRC에서 가장 오래된 경기다. 모나코는 바티칸시국을 제외하고
유럽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자, 1인당 국민소득 16만 달러가 넘는 부유한 나라로 각종 모터스포츠가 빈번하게 열리는 곳이다. 그런데, 유럽에서도 연중온화한 날씨로 잘 알려진 모나코에서 눈이라니? 사실 랠리의 주 무대는 대부분 프랑스와 알프스산맥의 산악 도로에서 펼쳐진다.몬테카를로 몬테카를로의 카지노 광장에서 성대한 개막 세리머니로 시작해 37km 정도 경주차를 타고 가서 밤 9시부터 본격적인 경기를 진행한다(WRC는 각 코스 사이의 거리도 직접 경주차로 이동해야 한다).
유럽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자, 1인당 국민소득 16만 달러가 넘는 부유한 나라로 각종 모터스포츠가 빈번하게 열리는 곳이다. 그런데, 유럽에서도 연중온화한 날씨로 잘 알려진 모나코에서 눈이라니? 사실 랠리의 주 무대는 대부분 프랑스와 알프스산맥의 산악 도로에서 펼쳐진다.몬테카를로 몬테카를로의 카지노 광장에서 성대한 개막 세리머니로 시작해 37km 정도 경주차를 타고 가서 밤 9시부터 본격적인 경기를 진행한다(WRC는 각 코스 사이의 거리도 직접 경주차로 이동해야 한다).

© Jaanus Ree/Red Bull Content Pool
변변찮은 가로등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산악 도로를 시속 200km가 넘는 속도로 달리는 건 일반 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WRC는 코스 전반에 걸쳐 안전장치는커녕 울타리도 없으므로 차량이 전복하거나 추락했을 때 그 책임은 오롯이 선수가 져야 한다. 그렇게 악명 높은 코스임에도 WRC 선수라면 몬테카를로 랠리의 우승을 꿈꾸는 이유는 시즌 첫 번째 경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세계에서 가장 유래가 깊은 랠리이기 때문이다.

© Jaanus Ree/Red Bull Content Pool
몬테카를로 랠리를 마치면 다음은 스웨덴 랠리가 기다리고 있다. 1950년부터 시작해 몬테카를로 버금가는 역사를 자랑하는 스웨덴 랠리는 토르스뷔(Torsby)와 칼스타드(Karlstad) 인근의 눈 덮인 산길을 달리는 고난도의 대회다. 몬테카를로 랠리가 하나의 대회에서 흙길, 아스팔트, 눈길, 얼음길 등 수많은 도로 조건을 이겨내야 한다면, 스웨덴 랠리는 대부분 눈밭 위를 달리는 이른바 설전(雪戰)에 가깝다. 선수 사이에서는 차라리 몬테카를로 랠리보다 스웨덴 랠리가 더 편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 Jaanus Ree/Red Bull Content Pool
한데 스웨덴 랠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단지 눈만은 아니다. 이 시기 스웨덴 랠리가 열리는 토르스뷔 인근 지역의 기온이 영하 20~30℃까지 떨어지다보니, 동력 장치에 전반적으로 문제가 생기거나 출력이 기존보다 저하되는 등 예상치 못한 차량 트러블이 종종 선수들의 발목을 잡곤 한다. 재미있는 점은 스웨덴 랠리는 눈이 녹으면 오히려 선수들이 낭패를 겪는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2014년 WRC에서는 코스 중간중간 눈이 많이 녹아 스노타이어의 징이 빨리 닳아 없어졌는데, 정작 눈이 많이 쌓인 곳에서는 차가 미끄러지는 사고가 일어나 선수들이 애먹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Video ⓒ WRC

WRC 2018 몬테카를로 포디움
끝을 알 수 없는 승부
2018년 WRC는 아시아의 두 맹주 토요타와 현대의 싸움으로 점철됐으나, 최종 라운드 이후 최종 우승은 368점을 얻은 토요타 가주 레이싱(Toyota Gazoo Racing)에 돌아가면서 막을 내렸다. 2인자 현대 모터스포츠(Hyundai Motorsport)는 최종 341점을 획득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만 했다. 특히 대회 초반 몬테카를로와 스웨덴 랠리에서 합계 41점을 얻어 31점을 받은 세바스티앵 오지에(Sébastien Ogier)보다 무려 10점이나 앞서며 쾌조의 스타트를 끊은 티에리 뇌빌(Thierry Neuville)의 입장으로서는 입맛이 다소 쓰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14라운드인 호주 랠리 이전까지 얻은 점수는 1위인 오지에와 불과 3점 차이였던 것이다.

© Jaanus Ree/Red Bull Content Pool
흙과 모래바람 그리고 눈보라까지, WRC의 매력은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아 위험하고 아슬아슬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짜릿하고 아찔한 매력이 있지 않나 싶다. 전 세계에서 가장 험하고 긴 오프로드 레이싱 대회, WRC의 2019년 시즌은 1월 24일 모나코 몬테카를로에서 다시금 성대한 막을 올릴 예정이다.